“2000억 엔 펀드 만들어 부실 선제 대응”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92호 24면

-글로벌 금융위기로 다들 여력이 없을 텐데 펀드 조성이 쉽게 될까.
“일본 쪽에서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다. 원-엔 환율이 1년 전의 두 배가 됐으니 일본 입장에서 보면 같은 금액의 투자효과가 두 배가 된다. 한국의 부실 자산이 다른 나라에 비해 우량하다는 판단도 하고있다. 한국에서 비즈니스를 해온 다른 나라 금융회사들도 한국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금융·기업 구조조정 선봉장 이철휘 자산관리공사 사장

-캠코도 투자를 하나.
“관련법상 직접 투자는 어렵다. 캠코는 펀드를 조성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투자 대상을 정하고 자금을 집행하는 실질적인 운영 책임을 맡는다.”
국내 부실자산에 투자하는 펀드를 조성하는 건 캠코가 그동안 해온 역할을 한층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다. 외환위기 뒤 성업공사에서 이름을 바꾼 캠코는 국내 부실자산을 인수해 주로 외국 투자자에게 매각하는 역할을 해왔다. 다급하게 파는 경우가 많다 보니 ‘헐값 매각’ 논란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부실자산을 인수한 외국 금융사들은 몇 년 만에 막대한 차익을 거뒀다. 구매자를 모아 미리 펀드를 만들면 이런 논란을 잠재우는 동시에 구조조정도 보다 원활하게 할 수 있으리란 게 이 사장의 생각이다.

이철휘 사장

-기존에 하지 않았던 일을 시도하는 이유가 뭔가.
“그만큼 상황이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에서 시작된 ‘투자은행(IB) 대란’이 세계 금융과 실물을 뒤흔들고 있다. 외풍이 워낙 거센 만큼 우리도 비상한 각오로 선제적으로 대비해야 한다. 특히 외화부문에서 시중은행이 몇 달간 차입을 거의 못할 정도로 어렵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캠코의 신뢰도가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부분이다. 정부의 자금지원을 받지만 우리가 추가로 할 수 있는 일을 적극적으로 찾고 있다.”

파생상품은 김밥과 같아
-캠코가 바빠진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 경제위기가 어디에서 비롯됐다고 보나.
“흔히 서브프라임 사태라고 하지만 본질은 IB 대란이다. 재정과 무역의 쌍둥이 적자에 시달려온 미국은 IB를 통해 외국자본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자금 유입에 필요한 수익률을 맞추기 위해 파생상품이 각광받았다. 가짜 돈(fake money)을 만들어 가상의 수익을 나눠 갖는 게임을 해왔다. 거품이 꺼지며 이게 거꾸로 됐다. 그동안 부풀려진 가짜 돈이 고스란히 실손실이 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이 막대한 돈을 쏟아 붓는데도 해결 안 되는 이유가 뭔가.
“파생상품은 김밥과 같다. 김밥 속에 단무지와 햄·시금치 등 다양한 재료를 넣어 말듯이 위험도가 다른 상품들을 이것저것 섞어 만든 게 파생상품이다. 그런데 이 상품에 문제가 생겼다. 하나하나 불량인지 아닌지를 가리기가 어렵다. 속에 넣은 재료 하나만 상해도 김밥 전체를 못 먹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손실규모를 많게는 5조 달러까지 추정하는데 이는 전 세계 금융회사의 자본금을 다 합쳐도 부족한 금액이다.”

-글로벌 위기 수습의 관건은 무엇인가.
“금융시스템이 정상화돼야 하고 자금 지원이 넉넉히 이뤄져야 한다. 또 자금 지원 뒤 추가 부실을 예방해야 한다. 하지만 거품을 해소하기 위한 디레버리징 규모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세계 각국이 힘을 합쳐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달러 가치나 미 국채가 폭락하는 보다 큰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이 사장은 최근 ‘예언자’란 별명을 얻었다. 올 초 “일부 금융회사의 위기가 아니라 세계 경제의 거품이 꺼지는 큰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하반기에 4대 투자은행 중 3곳이 문을 닫는 상황이 올 수 있다”고 예견한 게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그런 그가 요즘은 ‘일본식 장기불황’을 염려하고 있다. 일본 대장성 연구위원과 주일 대사관 재경관 등으로 10년 넘게 일본에 머물면서 본 거품 붕괴 과정이 요즘의 우리 상황과 닮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재정 쏟아붓고 고용 지켜야
-걱정하는 게 어떤 부분인가.
“일본은 우리보다 부동산 불패 신화가 훨씬 강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떨어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부동산 가격은 최고가격의 29% 수준으로 폭락했다. 3분의 1토막 아래다. 다른 자산도 마찬가지다. 골프 회원권 값은 최고치의 7%가 됐다. 금융시스템이 취약해 정상적이라면 살 수 있는 기업까지 위기를 맞았다. 은행들이 돈 빌려주기를 꺼렸다. 요즘 한국 상황과 같다. 하지만 속도는 한국이 훨씬 빠르다. 체감 부동산 가격이 불과 몇 달 만에 30~40% 빠졌다. 반값에 내놓아도 현금화가 안 될 지경이다. 일본식 장기 불황의 원흉인 디플레이션이 나타나고 있다. 더구나 디플레가 금융불안을 촉발한 일본과 달리 한국은 금융불안과 디플레가 동시에 나타나는 모습이다.”

-극복하기 더 어렵다는 말인가.
“우선 제조업이 문제다. 일본은 내수 비중이 80% 이상이어서 외풍의 영향이 제한적이지만 한국은 70% 가까이를 수출이 차지한다. 갑작스럽게 깊은 침체가 오다 보니 경쟁력 강화를 생각할 틈이 없다. 금융상황도 일본보다 좋지 않다.”

-대응도 더 강력해야 할 것 같다.
“우선 정부가 디플레 차단에 올인해야 한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경기를 살려야 한다. 재정 적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예산을 퍼부어야 한다. 일본에서 보듯 디플레는 한번 발동이 걸리면 백약이 무효다. 일본의 경우 제로 금리 정책까지 썼지만 디플레가 되니 실질금리는 매우 높았다. 두 번째론 중산층을 보호해야 한다. 중산층이 무너지면 방법이 없다. 필사적으로 고용을 지키는 게 관건이다.”

-일본의 경험에서 어떤 기회를 찾아야 하나.
“버블 붕괴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지난 10여 년간 일본의 강력한 제조업은 더욱 강해졌다. 취약했던 일본의 금융산업도 3대 은행으로 재편되며 몸집과 체질을 함께 키웠다. 세계 각국 은행이 다 휘청대도 일본만 멀쩡하다. 오히려 미국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돈줄이 되고 있다. 집값 하락도 국가경쟁력엔 도움이 된다. 도쿄 시나가와 지역을 재개발하는 비용이 버블 당시의 10분의 1 이하로 줄었다. 위기를 연장시킨 부실채권 처리를 신속히 한다면 극복시점도 앞당길 수 있다.”

이쯤에서 화제를 캠코로 돌렸다. 금융과 기업, 가계의 부실 처리는 모두 캠코의 몫이다. 캠코는 이미 저축은행의 프로젝트 파이낸스(PF) 자산 인수를 준비하고 있다. 다음 달엔 1000만원 이하의 일반 개인연체를 대상으로 한 채무재조정과 환승론 보증업무를 시작하고, 내년에는 대상금액도 3000만원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캠코가 외환위기 때와 똑같은 역할을 하게 되나.
“그렇지 않다. 외환위기 당시 망한 기업의 부실자산을 인수해 파는 역할을 했다면 지금은 기업이 망하기 전 부실자산을 선제적으로 가져오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일부 기업이 버티거나 자산 매입 가격이 다소 높아질 수 있지만 기업도 살리고 시장도 살릴 수 있다.”

-펀드를 만드는 게 자금이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닌가.
“캠코는 자본금(2600억원)의 10배인 2조6000억원까지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이 정도면 당면한 부실 처리엔 별문제가 없다. 저축은행 PF 부실 처리 채권 인수는 당초보다 4000억원 많은 1조7000억원으로 늘릴 것이다. 연말까지 은행의 부실채권도 1조원가량 인수한다. 하지만 장기적으론 자본 보강이 필요하다. 정부에 증자를 계속 요청할 것이다.”

-지난해 중국 등 해외 부실채권 시장에 진출했는데 당분간 중단되는 건가.
“아니다. 어려울수록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리먼브러더스나 메릴린치가 아시아에 남겨두고 간 자산을 매입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리먼의 경우 97년 사들인 부동산과 공장·호텔 등을 청산하기 시작했다. 매력적인 물건이 많아 관심을 갖고 보고 있다.”

-정부의 ‘공기업 선진화’ 방침이 캠코에도 적용되나.
“15% 감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고통분담과 효율성 제고를 외면하기 어렵다. 희망퇴직 등을 통해 최대한 고통을 분담하는 방향으로 가겠다. 하지만 분야별·계층별로 전문인력을 충원하고 주어진 여건 내에서 신규 채용을 늘리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