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1.2차大戰 겪으며 독일찬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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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합창’이 연말연시 자선음악회의 단골 레퍼토리가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헤어 스타일에서부터 베토벤의 이미지를 닮으려고 했던 바그너가 1846년 드레스덴에서 열린 자선음악회에서 1백50명의 연주자를 위한 3관편성으로 편곡해 지휘하기 전까지만 해도 ‘합창교향곡’은 매우 난해한 곡으로 알려졌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게 헌정됐던 ‘합창교향곡’은 초연때부터 정치상황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었다.메테르니히의 명령으로 4악장이 ‘자유의 찬가’대신 ‘환희의 찬가’로 제목이 바뀌는 불상사를 겪었고,베토벤이 정신이상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았더라면 경찰에 체포되었을지도 모른다.

미국의 사학자 데이비드 데니슨은 최근 그의 저서 ‘독일정치 속의 베토벤,1870∼1989’(예일대 출판부 刊)에서 근대 독일 정치사에 얽힌 베토벤의 이미지를 분석하면서 이같은 흥미로운 내용을 밝혀냈다.

그후 ‘합창교향곡’은 베토벤 페스티벌은 물론 각종 정치행사에서 자주 연주됐다.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난 다음 지난 89년 12월23일 제2차 세계대전 참전국 출신 단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베를린 필하모니홀에 모여 번스타인의 지휘로 ‘합창교향곡’을 연주했다.폭격으로 종탑이 두동강난 빌헬름 황제 기념교회당 옆에서 수많은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필하모니 공연이 대형 스크린을 통해 생중계됐다. 제1차 세계대전때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합창단은 ‘합창교향곡’ 연주를 거부했다.독일국민이 죽어가고 있는데 한가롭게 ‘환희의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휴전후 2개월만인 1918년 12월31일 아르투르 니키시 지휘로 ‘평화와 자유’에 바치는 콘서트에서 ‘합창’이 연주됐고 27년4월 베토벤 서거 1백주년 기념공연이 베를린 알테스무제움 계단을 비롯해 독일 각지에서 열렸다.브라스 밴드와 독일노동자연맹 합창단이 야외공연을 이끌었다. 그후 ‘합창교향곡’은 36년 베를린올림픽 개막공연,37년 파리에서 열린 독일박람회,42년 히틀러의 생일축하 행사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괴벨스는 2차대전을 ‘독일의 위대한 문화유산인 베토벤을 수호하기 위한 성전(聖戰)’이라고 떠벌려댔다. 베토벤을 ‘자유와 진보를 위한 투사’ ‘열정적인 휴머니스트’ ‘마르크시스트’로 내세운 동독 지도자들은 52년 베토벤 서거 1백25주년 기념식을 거행하면서 이를 본의 서독정부에 대한 경고로 사용했다.

데니슨은 독일 정치지도자들이 좌우익을 막론하고 베토벤에게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강력한 지도자·혁명가·평화주의자·국제주의자등 다양한 이미지를 발견해냈다고 분석했다.이들은 베토벤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카리스마적 지위를 확보하는 전략을 구사했다.그래서 시대에 따라 베토벤의 초상과 동상은 매우 다른 모습으로 제작돼 왔다는 것이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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