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한국금융>中. 경영 제로지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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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안건=한보 외화대출.만장일치로 의결함.안건=한보 운영자금.만장일치로 의결함.'

제일.조흥은행등 한보철강에 막대한 돈을 퍼준 은행들의 이사회 의사록이다.

“토의 내용이나 반대의견은 일절 의사록에 남기지 않습니다.행장이 결정한 대출안건에 감히 누가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한보철강 대출과 관련,은행감독원 특검에서 징계를 받은 한 시중은행 임원의 고백이다.그의 고백은 우리 은행에 만연한'경영 부재(不在)' 현실을 있는 그대로 고발하고 있다.경영진은 있으나 경영은 없는 은행의 현실이 한보사태의 한 원인

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보사태를 전후한 은행들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중증(重症)의 경영부재 실상이 낱낱이 드러난다.겉모양이야 은행빌딩들처럼 번드르르 하지만 썩은 속이 문제다.

제일은행은 지난해 3월'기업부실화 예측모형'을 만들었다.이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은행빚이 매출액을 웃돌 정도로 늘어나거나 분식결산하는 업체는'부실징후기업'으로 분류하고 신규대출을 중단하도록 돼있다.한보철강이 바로 이런 경우였으나

이 규정은 아무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다른 관련은행들도 대동소이했다.

직급별 여신전결 한도 규정도 부실여신을 사전에 방지하는 장치로 마련돼 있지만 안전판이 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픽 참조〉

윗선 결정에 거부 못해

제일은행의 한 심사역은“거액여신은 윗선에서 결정돼 내려오는 사항인데 부실징후가 있다거나 추가여신이 어렵다고 해서 심사역이 어떻게 반대 의견을 낼 수 있겠는가”라고 털어놨다.요컨대 은행장이 마음만 먹으면 심사규정이니,전결한도니 하는

것들이 무용지물이라는 얘기다.

은행 경영의 요체가 여수신 관리를 제대로 하는데 있다고 본다면 우리은행들은 아직도 한참 멀었다는 뜻이기도 하다.한보사태가 터진후 경영공백 현상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정부나 한국은행이 아무리 돈을 풀어도 돈이 제대로 돌지 않고 있다

.돈을 쌓아두고 금융기관끼리 돌리거나 달러투기에 나서고 있다.기업대출은 대기업이나 담보가 충분한 중견기업에 집중될 뿐 중소기업은 신용좋고 장래성이 있어도 외면당하고 있다.

한보의 사후처리 역시 삐걱거리는 소리만 요란하다.일부 은행에서는 노조를 내세워 채권단에서 합의한 지원금마저 내지 않고 있다.조흥은행같은 곳에서는 노조가 차라리 한보에 내준 돈은 떼인 셈 치고 무조건 추가지원은 하지말라고 나서고 있

다.노조가 아예 경영까지 맡고나선 셈.

어윤대(魚允大.고려대)교수는“그동안'실세'들에게 잘보이고 사고만 막으면 이익이 보장되던 습성에 젖어 은행경영이 낙후돼 버렸다”고 진단한다.돈 쓰려는 기업은 줄을 서 있으니 웬만하면 이익은 나고,따라서“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의식

이 은행 노사간에 만연돼 있다는 지적이다.

신한銀선 심사委 활용

그런 결과는 미국.영국등 선진국 은행에 까마득히 뒤지는 경영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다.외형이나 효율 양면에서 모두 세계 12위의 교역국이라는 국가 위상에 걸맞지 않은 양상이다.

국내 시중은행을 대표하는 조흥.상업등 7대 시중은행의 총자산을 전부 합쳐야(2천5백43억달러,95년말) 미국 시티은행(2천5백68억달러)에 못미친다.국내 7대은행의 자기자본 이익률은 평균 3.95%로 미국 7대은행(22.7%).영

국 7대은행(32.1%)에 까마득히 뒤진다.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가장 앞서가는 신한은행의 경우가 좋은 예다.이 은행은 우선 은행장이 여신심사 권한을 고집하지 않는다.“전무를 위원장으로 융자부장.자금부장등 실무자 9명으로 구성된 여신심사위원회가 여신관리를 하고 있기 때

문에 은행장에게는 여신관계 서류가 아예 올라오지 않습니다.”(羅應燦 행장)

그는“금융업무가 급변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많은 권한을 분산해야 하고 여신심사도 전문적인 위원회에 위임해 처리하는게 합리적일 것”이라고 밝혔다.

한보에 물린 다른 은행들이 누가 은행장.전무가 되느냐를 놓고 내분을 겪고 있는 동안 이 은행은 14년만에 처음으로 간부직원의 임금을 동결하고 임원들은 급여의 10%를 스스로 반납하고 나섰다.서울에서 영업중인 외국계 은행에서도 배울

점이 많다.홍콩 상하이(上海)은행의 지오프 캘버트 서울지점장은“기업체에 대한 여신은 심사기준에 따라 재무구조가 탄탄하고 사업성만 좋으면 여신전담 매니저 전결로 결정된다”고 말했다.심사는 엄격하게 하되 결정은 직급별 전결한도에 따라

신속하게 한다는 것.

한보처럼 사업성을 은행들이 제대로 평가하기 어려운 프로젝트라면 대학이나 외국의 전문기관을 활용하는 방안(어윤대 교수)도 제시되고 있다.뒤늦은 처방이지만 대형 기간산업의 경우 정확한 신용분석과 위험분산을 토대로 여러 은행들이 동참하

는 프로젝트 파이낸싱도 활성화돼야 한다(金上出 상업은행여신심사역).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운영을 제대로 해야하는 것은 물론이다.

“예전에도 여신심사위원회제도가 있었지만 행장의 권한이 무소불위여서 소용이 없었다”(魏聖復 조흥은행상무)는 지적은 매우 함축적이다.사람보다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체제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김동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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