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 밤거리의 여중생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아이들은 학교에 없다. 방학이 벌써 끝났는데도 말이다.요즘 10대들을 만나려면 주유소·노래방·록카페에 가는 편이 교문 안쪽을 기웃거리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 10대들이 노는 동네로 소문난 돈암동·화양리까지 갈 필요도 없다. 신촌이나 대학로에도 그네들은 예외없이 서성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밤의 신촌에서 마주친 그네들 다섯 명.빨강·파랑·노랑 원색의 누비윗도리,허리춤에 엉거주춤 걸려 있는 통넓은 힙합바지,방울핀으로 분수처럼 묶은 단발머리.‘서태지와 아이들’이후 최고 인기라는 HOT와 영턱스클럽을 섞어놓은 듯한 차림새는 한눈에도 ‘요즘 여중생’같다. 차림만이 그런 게 아니다.레코드가게의 대형 화면에서 영턱스의 춤이 흘러나오자 나이든 사람들은 디스크라도 걸릴 법한 ‘나이키춤’의 에너지를 금방 드러낸다.

“니네,날라리 아니니?” 옷차림을 두고 한마디 던지자 다섯 여중생의 대답이 한결같다.자기네는 교복입고, 학교갈 때는 화장지우고 귀걸이 빼는, 그야말로 ‘보통’애들이란다.“날라리들은 교복을 입어도 어떻게든 표를 내요.치마는 아주 짧거나 길게 입고, 블라우스 입어야 할때 폴라 입고, 폴라도 회색을 입어야 할때 검은색을 입죠.” “날라리들은 여관도 밥먹듯 드나들고,아르바이트도 단란주점에서 2차까지 뛰어요.” 2차? “성관계까지 가는 거예요.” 집에는 외박하고?“가출하는 거죠.”

그런 날라리들에 비하면 자칭 보통아이들인 이네들은 서울 변두리의 한동네 친구들.그러나 돈이 없어 근처 놀이터를 맴돌때 말고는 신촌은 물론이고 지하철이 닿는 이대입구·대학로·건대입구·가리봉동 어디든 마다않는 마당발들이다. <관계기사 34면>

돈만 있으면 시간보낼 곳은 많다.한잔에 3천원하는 커피숍, 시간당 1만5천원짜리 노래방, 1인당 3천5백원짜리 비디오방, 맥주 한병에 5천원하는 록카페, 노래방은 손님이 적은 낮에 가면 같은 돈에 두시간까지도 부를 수 있다.비디오방은 낮에는 자주 가지 않는 대신 ‘날밤깔 때’(밤새울 때) 가장 만만한 곳이다. 매트리스 깔린 소위 침대방은 하룻밤 두명 기준 1만원, 비디오방에 따라 네명까지도 같이 들어가게 해준단다. 일행중 ‘못난이’가 “실컷 놀려면 1인당 2만∼3만원이 든다”고 종합해준다.

중3짜리 ‘못난이’는 딴 애들은 예쁜데 혼자 못생겼다고 스스로를 그렇게 부른다.사실 눈밑에 아이라인이 너무 굵은 걸 빼면 딱히 못난데도 없지만 중2짜리 ‘이쁜이’에 대면 겸손해 할 법도 하다.화장을 했대서 아이답지 않은 건 아니다.피부가 맑은 걸 스스로도 알기 때문에 트윈케이크를 덕지덕지 바르는 따위는 결코 하지 않는다.

이네들의 자랑은 남자들한테 놀자고 해서 ‘뺀찌 맞아본’(거절당해본) 적이 없다는 것.뺀찌커녕 가끔은 대학생 ‘아저씨’들도 귀엽다고 말을 건다.장래 희망이 슈퍼모델인 중2짜리는 자기말로 지금 ‘세 다리’란다.남자가 셋이란 얘긴데,딱히 따로만 만나는 것같지 않고 무리지어 노는데 익숙하다.

마침 이네들과 어울리고 있던 남자들은 고교생 혹은 그 또래인 ‘터프가이’와 ‘노랑머리’. 똑같이 링 귀걸이와 염색머리,모자달린 누비점퍼에 스스로도 ‘똥싼바지’라 부르는,정도가 심한 힙합바지 차림이다.요즘 읽은 책을 묻자 자칭 터프가이는 ‘신한국을 날다’란 낯선 제목의 정치 홍보물을 들이댄다.이대 앞에서 노래방 ‘삐끼’노릇을 하다 붙들려 사흘동안 유치장에 있으면서 읽은 것이란다.“1주일에 한번 꼴,한번에 3주일 길이로 가출한다”고 계산이 맞지 않는 가출경력을 소개하는 그는 터프가이보다 아직 여리여리한 소년. “테이블당 노래방은 3천원,단란주점은 5만원”이라고 수입을 밝히는데 아무래도 가출중인 듯하다.

여중생 중에는 ‘못난이’와 장래희망 ‘빽까리’(백댄서)인 중3짜리,자칭 ‘쎄씨걸’이 커피숍·피자집·노래방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봤단다.가출경험이 있는 쎄씨걸은 “저희집이 문제가정이거든요”한다.“낮술 마시는 아버지 빼고 엄마·남동생과 셋이서만 살았으면”“춤연습실에 다녔으면”하는 말이 흘러나온다.장래와 관련,공고 진학이 결정된 못난이는 “대학같은 거 갈 생각없다”고 잘라 말한다.취직하고 장사할 것이란다.논다고 미래가 더 불안할 이유는 없다.“아는 아저씨인데,옛날엔 놀다가 지금 단란주점하거든요.열심히 일하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노랑머리도 비슷하다.“장래희망? 소주방 사장이오.” 반면 쎄씨걸은 대학욕심이 있다.

별 것 아닌 농담 한 마디에도 “까르르 까르르”하던 이네들도 가슴답답할 때가 있는 걸까.노래방에 들어서기 무섭게 아이들은 추렴한 돈으로 담배 한갑을 산다.맹렬하게 빨아대는 기세에 88담배 한갑이 금세 바닥난다.주주클럽이나 영턱스클럽 못지 않은 새된 목소리로 뽕짝조의 추임새를 넣어가며 노래를 부르는 사이 ‘슈퍼모델’의 통금시간이라는 밤9시가 훌쩍 넘어선다.

아쉬운대로 일어서야 할 시간이다.친구집에서 자고 온다고 허락받은 못난이와 이쁜이는 비디오방으로,다른 아이들은 잔소리와 ‘뒈지게 맞는’ 일이 기다리는 집으로 향한다.그래도 헤어지면서 하는 말이 내일 또 나오잔다.아니,나와야만 한단다. <이후남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