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이번에도 … 전문가들 다 어디 있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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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특히 금융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장밋빛 전망만 믿고 아무 것도 모른 채 주식과 펀드에 투자, 많은 손해를 본 사람은 그 전문가들의 무책임함에 분노를 느끼기도 할 것이다. 이래저래 전문가의 신뢰성은 땅에 떨어졌고, 이제 한국 인터넷에서는 정부 고위관료나 권위있는 전문가의 말보다 ‘미네르바’라는 재야 익명 논객의 말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정부 관료나 전문가의 신뢰도가 떨어진 이유 중의 하나는 아마도 이들이 과거에 사실을 숨기거나 자신의 견해를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관료들은 고위층의 의중에 따라 사실을 왜곡하고, 증권사의 금융전문가는 자기 회사의 이익을 위해 전문가로서의 솔직한 의견을 제대로 말하지 않았던 경우를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객관적이고 공정해야 할 교수나 연구원마저 자신의 입지를 위해 여기저기 눈치를 보면서 말을 에둘러 하니, 옳건 그르건 자신의 소신을 직설적으로 내뱉는 재야의 익명 인사의 말이 어찌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겠는가.

아마도 한국의 전문가들이 땅에 떨어진 신뢰를 되찾으려면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자신의 소신을 뚜렷이 밝히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소신있는 발언 태도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전문가로서의 능력일 것이다. 사실 더 근본적 문제는 여기에 있다.

왜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정부나 대학, 금융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는데, 다가오는 경제위기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을까. 필자가 보기에 그 원인은 전문가 양성 시스템의 결함에 있다고 생각된다. 현대의 학문은 너무 세분화·전문화되어 천재(天才)가 아닌 한 자기가 전공하는 아주 좁은 분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기에도 급급하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전문가는 나뭇가지의 세세한 문제에 대하여는 많은 것을 배우지만 숲 전체를 보는 훈련은 되어있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복잡한 금융공학의 계산방법을 개선하는 데는 시간을 많이 쓰지만, 그 공식이 나오게 된 근본 가정이 과연 옳은지, 더 나아가 실물경제와 유리된 금융공학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고민은 별로 하지 않는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전문가들이 미세한 기교에는 능하나 건전한 상식에 입각하여 전체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능력은 결핍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전문가들의 한계는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기에 최근 지식의 융합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전체를 조망하는 관점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지식을 창출하기보다 남의 지식을 수입하는 데 더 급급한 후진(後進) 지식국가에서는 이러한 한계에 의한 부작용이 더욱 심각하게 나타난다.

전문가들이 자기 나름대로 독창적으로 생각해본 일이 없기 때문에 시효가 지난 남의 정책을 생각없이 따라하고, 비정상적인 위기 상황인데도 과감하고 혁신적인 발상의 전환을 못하는 것이다. 반면 미국이 이번 금융위기에 대응하는 것을 보면 교과서적 지식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정책들도 과감하게 쓰고 있다. 아마도 교과서를 써 본 전문가들이어서 교과서에 있는 지식의 한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그 한계를 벗어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당면한 이번 위기뿐 아니라 앞으로 닥쳐올 수 있는 국가적 위기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전문가 집단의 힘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

단순히 외국에서 남이 한 일을 맹목적으로 따라해서 학위나 받아온 이류 지식인이 아니라, 독창적이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남보다 앞서 낼 수 있는 진정한 일류 지식인을 양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남과 다른 아이디어를 포용할 줄 아는 관용의 사회, 다양성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염원하는 노벨 과학상이나 경제학상도 나오고, 우리나라가 21세기의 세계를 이끌어 가는 선진 지식국가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오세정 서울대 자연대학장·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