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에세이>호암아트홀 상영 "샤인"을 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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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우리 평범한 사람들은.천재'들에게 동경과 시샘이라는 이중적 감정을 느끼게 마련이고,그래서 그런지.천재의 광기'는 많은 영화인들에게 매력적인 소재가 돼왔다.그러나 .샤인'은 우리의 호기심이나 안도감을 위해.천재의 광기'에 초점을 맞 춘 영화가 아니다. 주인공은 분명 천재고 그의 삶은 10년씩이나 정신병원신세를 질 정도로 비정상적인 것이었지만 그는 결코 괴팍한 인물로 그려져 있지 않다.오히려 벌거벗고 뛰놀고 싶어하는 천진난만한 사람일 뿐이다.에덴동산의 아담처럼 선과 악을 모르는 백지와같은 존재다.그리고 이 영화가 그리는 것은 이 아담이 성장해가는 과정인 것이다. 주인공 데이비드 헬프갓은 한때 거의 모든 음악경연대회를 휩쓸다 라흐마니노프의.피아노협주곡 제3번'을 멋지게 연주해낸 뒤 극심한 신경쇠약으로 정신병원 신세를 지게 된 피아니스트다.영화전반부의 정점은 그가 바로 이.악마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장면이다. 그 곡을 완벽하게 소화해 경연대회에서 우승하는 꿈은 그와 그에게 모든 것을 걸었던 아버지 피터 헬프갓의 숙원이자 삶의 목표였다.영화의 전반부는 그들 부자관계를 축으로 해 데이비드라는 백지에 아버지 상(像)이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맞춘다. 데이비드에게 아버지는 엄격하고 이성적이며 거역하기 힘든 존재다.아버지는 그에게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음악만을 강요한다.그래서 카메라는 그 곡을 치는 손가락의 현란한 움직임과 피아노 건반 위로 떨어지는 그의 땀,그리고 아버지의 눈물 에 앵글을 맞출 수밖에 없다. 목표를 달성했다고 느끼는 순간에 인간은 더이상 무엇을 할 수있을까.그 뒤에 오는 허무와 탈진은 당연한 귀결이고,그러한 허무를 즐기기에 데이비드는 너무 어린 나이였는지 모른다.이제 아버지가 만들어주고 추구해온 세상은 끝났다.그 혼 란감 때문에 그는 고통과 광기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한 그에게.어머니'의 존재가 다가온다.영화의 후반부는 정신병원에서 만난 베린의 따뜻하고 풍만한 젖가슴을 만지작거리며 어머니의 온기를 얻게 된 데이비드가 한 허름한 술집에서.왕벌의비행'을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순간으로 시작된다.한적한 골목길에서 한떼의 소년들이 즐겁게 놀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이 곡은 그가 새로이 찾게 된 음악의 세계가 더이상 청중들의 환호 속에 이뤄지는 음악적 승리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느끼는 기쁨의 음악이라는 것을 나타 낸다. 이제 그는 즐거움과 풍요로움 속에서 피아노를 칠 수 있으며,그의 열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기쁨을 알게 된 것이다.그는 태양만이 빛나는 존재라고 믿던 이성적인 아버지 세계에서당당히 걸어 나와 밤하늘의 별들을 숭배하는 감성 적인 여인 길리언을 아내로 맞게 된다.아버지에게 눌려 어머니의 사랑과 영향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그가 15년 연상인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어머니에 대한 보상심리일지도 모른다.그리고 감동적인 재기의 연주를 마친 데이비드는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 사랑과 증오의 대상이었던 아버지와 화해한다.사랑과 음악을 통해 영혼의 상처를 치유한 그는 인간적으로도 한층 성숙해지게 된 것이다. 생존 본능과 이성만이 강요되는 이 삭막한 세상에서도 역시 무언가 가슴에 와 닿는 것은 감성과 열정인가. <변호사> 오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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