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적 병역기피자 무죄선고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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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법원이 21일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해 처음으로 무죄 판결을 내림으로써 병역 거부를 둘러싼 논쟁이 전개되고 있다.

진보적 시민.인권단체들은 "인권의 지평을 넓혔다"며 환영했다. 반면 일부 종교.안보 단체는 병역 거부자를 양산할 것이라는 우려를 보이는 등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이번 판결은 1심 단독판사의 판결로 대법원의 판례와 배치되는 것이어서 상급심에서 뒤집힐 가능성도 없지 않다.

◇'양심의 자유'적극 해석=그동안 법원은 ▶평등권(제11조)▶국방의 의무(제39조) 등 헌법 조항을 내세워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1969년 등 세 차례의 재판에서 "종교의 교리를 내세워 법률이 규정한 병역의무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이른바 양심상의 결정은 헌법에서 보장한 종교와 양심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고 분명히 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 재판부는 양심의 자유를 폭넓게 해석했다. 다수의 양심이 소수의 양심을 무시해도 안 되고, 소수의 양심이 다수에 의해 강요돼서도 안 되는 것이 양심의 자유라고 적시했다. 헌법 제19조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부는 국제규약도 무죄의 근거로 삼았다. 지난달 19일 제60차 유엔 인권위원회는 캐나다.영국.한국 등 34개국이 제안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한편 재판부는 국가안보 우려에 대해 "양심적 병역 거부자는 연간 징병인원 30만명의 0.2%에 불과해 국가방위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고, 첨단무기가 주도하는 현대전의 양상을 고려할 때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대체복무제와 함께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가려낼 구체적 기준을 마련하면 고의적 병역 거부자를 충분히 가려낼 수 있다는 것이다.

◇찬반 논쟁 가열=진보성향의 시민단체들은 환영 의사를 나타냈다.

'병역 거부권 연대회의'는 성명서를 통해 "이번 판결은 국가안보 논리에 의해 희생당해 왔던 양심의 자유에 대한 원칙을 제시했다"면서 "정부의 실질적인 제도개선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참여연대 이태호 정책실장은 "우리 사회의 인권 포용력을 키우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날 무죄 판결을 받은 황모(32)씨는 "총만 안 든다면 병역보다 기간이 길더라도 상관없다"며 "농촌활동, 재해복구 참여 등 군복무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보수성향 단체들은 반대 입장이다. 정창인 재향군인회 안보연구소 연구위원은 "국가 단위로 전쟁이 일어나는 이상 양심의 자유가 병역의 의무를 피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는 것은 법 논리로도 무리"라고 주장했다.

자유총연맹 장수근 홍보매체본부장은 "이번 판결은 국민개병제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라며 "병역 거부자가 늘어나 선의의 피해자가 양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박승철 홍보부장은 "병역 거부자들이 재판과정에서 '양심'을 입증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신념의 충실성을 입증했을 뿐"이라며 "특정 종교에 대한 특혜"라고 지적했다.

◇병무청은 불인정=병무청은 "이른바 양심적 병역 거부자의 거부권이나 이들에 대한 대체복무의 도입을 반대한다"고 반대 입장을 재확인했다. 병무청 관계자는 "특정 종교의 신념에 따른 대체복무를 인정하면 병역의무의 형평성을 저해한다"고 우려했다. 종교를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합법적인 기피 수단을 만들 뿐이라는 설명이다.

김현경.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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