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찾아서>19.명암 寒山寺 上.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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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사람이 있어 한산 가는 길을 묻는구나

그러나 한산엔 길이 통하지 않네.

나같으면 어떻게 갈 수가 있지만

내 마음 그대 마음같지가 않네.

만일 그대 마음 내 맘같다면

어느덧 그 산속에 이르리라.

기자는 이 한산시 한수를 떠올리며 한산자(寒山子)가 살았던 바위굴 한습동을 찾아갔다. 절강성 천태산 국청사 서남쪽 70리길. ‘한습동’(원명 명암사)은 한산과 그의 절친한 친구고 법형제였던 국청사 중 습득(拾得)이 함께 노닐던 동굴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시를 잠시 감상해보자. 어떤 사람이 참된 인생의 길을 묻는다. 그러나 그 길은 대답해줄 수도, 또 답도 없다. 참된 인생이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마음만 같다면야 답이 없어도 그 길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선가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절실한 심인(心印)의 노래다. 선은 늘 보통의 상식을 뒤엎는 전도(顚倒)의 아성으로 들어가 우리가 정신적·생물학적으로 살고있지 논리적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잠자는 ‘평상심이 곧 도(平常心是道)’라는 것이다.

한산은 중도 속한(俗漢)도 아닌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은둔자였다. 그러나 구태여 이분법적으로 가른다면 승(僧)쪽이고 한 생각 일으켜 우주를 대긍정한 선장이다. 그는 중국 은둔사의 제1인자이며 ‘성인’으로까지 추앙된다. 그래서 공자·노자같은 성인에게나 붙이는‘자(子)’자를 붙여 한산자라 한다.

한산과 습득은 자작나무 껍질을 엮어 만든 모자를 쓰고 너덜너덜 해어진 옷을 입고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언뜻 보면 사람인지 짐승인지 분간키 어려웠다고 한다. 이같은 형용은 진리를 체득한 사람이 짐짓 그 모습을 감추고 삶을 교화하려 함을 상징한다.

한산은 며칠에 한번씩 국청사 별좌(別座:부엌에서 음식 만드는 소임)인 습득에게 가서 모아둔 누룽지와 음식찌꺼기를 한보따리 싸주면 가지고 와 먹으며 지냈다. 그는 은둔주의자(노장)며 민중주의자(선불교)였다. 그러나 그의 은둔은 염세나 도피가 아니라 날카로운 세속비판의 칼날을 세우기 위한 세상과의 일정한 ‘간격’이었을 뿐이다.

동양사상은 전통적으로 고절(孤絶)의 심산유곡과 광기(狂氣)를 ‘속물비판’의 왕성한 에너지원으로 삼아왔다. 한산은 이같은 유곡(幽谷)과 광기의 유희삼매 속에서 승려·여자·부자·도교등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한산·습득·풍간을 ‘국청삼은(國淸三隱)’또는 ‘천태삼은’이라 한다. 습득은 국청사의 천태풍간선사가 적성산을 지나다 길가에서 주워다 길렀다. 그래서 이름도 ‘주웠다’는 뜻으로 습득이라 했다. 습득은 국청사 중이 됐는데 ‘미치광이’취급을 받아 밥솥에 불때고 식기 닦는 부엌일과 마당쓸이나 했다. 그는 한산을 형이라 불렀다. 두사람은 함께 도(道)를 즐겼고 시를 읊으며 자적했다.

이들 두사람에게는 한소식 전해주는 교훈을 담은 일화들이 많다. 또 두사람은 지금까지도 유명한 동양화의 화제(畵題)다.

‘천태삼은’은 모두가 생몰연대 미상이다. 다만 조주선사와의 문답과 그들의 시를 찬(撰)한 태주 자사 여구윤(閭丘胤)의 생몰연대로 보아 8세기 후반 인물로 추정될 뿐이다. 어느날 자사 여구윤이 풍간선사를 찾아가 법요(法要)를 물었다. 풍간은 문수(한산)와 보현(습득)한테 물어보라며 자사를 그들이 있는 국청사 부엌으로 안내했다. 누룽지를 먹고 있던 두사람은 자사를 보자 껄껄 웃고는 산속으로 도망쳐버렸다. 이는 선의 경지에서는 무엇에도 구애되지 않음을 상징한다.

여구윤의 ‘한산시집’ 서문 기술은 더 극적이다. “부엌으로 가니 두사람은 가마솥 앞에서 크게 웃고 있었다. 내가 절을 한즉 두사람은 함께 나를 꾸짖고는 가가대소하면서 ‘풍간은 수다스런 놈이야! 아미타불도 모르면서 우리한테 절은 해서 무엇하느냐’고 했다. 중들이 모여들어 ‘왜 높은 관리가 거지들한테 절을 하는가’라고 하자 두사람은 손을 맞잡고 달려나가 한암(寒巖)으로 가버렸다”.

여기서 또 하나의 일화가 이어진다. 여구윤이 관청으로 돌아와 옷 두벌과 향·약등을 마련해 직원 5명을 시켜 한암으로 공양하러 보냈다. 한산과 습득은 공양온 관리들을 보자 “도적아!도적아! 너희들에게 말한다. 각각 노력해라”하고는 바위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바위굴이 저절로 닫혀버렸다. 자사는 직원들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난 후 국청사 중에게 명해 한산과 습득의 행장(行狀)을 쓰게 했다. 그리고 대나무·바위·벽등에 써놓은 한산의 시 3백여수와 한암 토지신묘(廟) 벽에 쓴 습득의 게송들을 모아 한권의 시집을 펴냈다. 이것이 선문학의 집대성으로 평가되는 ‘삼은시집’(三隱詩集·통칭 한산시집)이다.

생전 처음 가본 한산은 그 이름처럼 그렇게 춥고 깊은 산은 아니었다. 끝자락의 조그만 돌산이고 바위굴들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하늘로 치솟은 바위와 천연의 동굴들은 능히 영화나 예술사진의 한 장면이 될만한 절경이다. 따라서 ‘한산·한암’은 산세나 기후조건이 아니라 한산자의 차갑고 고고한 속물비판 정신의 상징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한산자가 살았던 동굴이 있는 곳의 실제 지명은 명암(明巖·일명 寒巖)이다.

동양정신에서 ‘추위’는 지조와 절개·무소유(無所有)를 상징한다. 그래서 추위속의 소나무·대나무·매화·국화등은 절개의 표상이다. 이를 대표하는 일구(一句)가 ‘매화꽃은 일생을 추위속에서 지내지만 결코 그 향기를 파는 일이 없다(梅一生寒 不賣香)’라는 것이다. 차가운 비판정신과 지고한 인격이 인명겸 지명인 ‘한산’에 담겨 있는 이미지다.

산문에는 명암사(明巖寺·일명 명암 한산사)라는 가로 편액이 걸려있다. 양옆으로는 ‘입불경계(入佛境界)’‘명암성경(明巖聖境)’이라는 주련(柱聯)이 있다.

주지 예결비구니(53)를 찾아 안내를 청했다. 예결(禮潔)법사는 원래 회사원이었다가 한 생각 일으켜 상해 금산사로 출가, 수계한후 4년전부터 이 절로 와서 사찰 복원불사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상주 승려는 10명(비구5명, 비구니5명)이다. 한산에는 동굴이 모두 5개가 있는데 이를 총칭해 명암이라 부른다고. 볼게 너무 많다. 우선 아는 것부터 안내를 청했다. 한산·습득이 들어가자 문이 닫혔다는 동굴로 갔다. 대웅전앞 바위가 가운데 틈새를 벌리고 마치 양쪽 문처럼 나란히 서있다. 주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5마영(五馬影)”.

바위 벽면에 5마리의 말 그림자가 있다. 자사 여구윤이 보낸 5명의 관리가 말을 몰아 도착하자 한산과 습득이 절벽 동굴로 들어가고 동굴문이 닫힌후 5마리의 말 그림자만 바위에 영인(影印)됐다는 전설의 실체다. 바위 빛깔보다 훨씬 진한 5마영을 자세히 보니 생동감 넘치는 비마상(飛馬像)이다.

대웅전은 동굴에 연결해 신축, 동굴안이 바로 불당이다. 동굴안 불당자리가 한산자가 주석했다는 곳인데 30평 정도다. 동굴 대웅전 후면 둘레에는 오랜 세월동안의 풍화작용과 전설을 담은 자연 마애불상이 수십개 형성돼 있다.

한산이 시를 써놓았었다는 ‘한산시목(대나무)’들은 문혁때 다 베어버려 없다. 새로 심은 어린 대나무들이 푸른 생기를 발산하고 있어 서운함을 다소 덜어 주었다. 명암 한산사는 전성기에는 5백여명의 승려가 상주, 우물만도 음료용·채소용·세면용등 3개나 됐다고 한다. 현재도 그 우물들이 입구에 그대로 남아 있다. 복원불사는 95년부터 본격화했다는데 대웅전 외에도 암자·탑·인물상등 많은 것들을 해놓았다. 대단한 속도다.

증명:月下 조계종종정 ·圓潭 수덕사방장

글:이은윤 종교전문기자 사진:장충종 기자 명암 寒山寺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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