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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난민 이비세비치, 독일서 ‘사커 드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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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독일 프로축구 분데스리가가 혜성처럼 등장한 신출내기 공격수로 들썩이고 있다. 이름은 베다드 이비세비치(24). 리그 선두를 달리고 있는 호펜하임의 골잡이다.

전란의 상흔을 극복하고 유럽 최고의 골잡이로 성장하고 있는 이비세비치(左)가 16일(한국시간) 분데스리가 경기에서 볼프스부르크 수비수와 볼을 다투고 있다. [만하임(독일) AP=연합뉴스]


전체 34라운드 중 14라운드를 치른 현재 16골로 득점 선두를 달리고 있는 이비세비치의 경기당 골 수는 무려 1.33이다. 독일 축구계는 ‘득점기계’ 게르트 뮐러가 세운 시즌 최다 골(40골·1971년) 기록을 깰 후보로 그를 주목한다. 지금까지의 평균 골 기록이 이어진다면 45골을 넣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비세비치는 장신(1m89㎝)을 바탕으로 한 제공권과 부지런히 움직이는 운동량이 발군이다. 내년 1월 열릴 겨울 이적시장을 앞두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새로운 돈줄로 떠오른 맨체스터시티와 토트넘은 이미 그를 놓고 영입 경쟁에 돌입했다.

무명 돌풍의 스토리를 써 가고 있는 이비세비치의 인생 역정은 더욱 드라마틱하다. 1992년 유고내전 발발 2년 전 전장인 보스니아지방 블라세니카에서 태어난 그는 내전이 터지자 이웃 도시 투즐라로 이주한 전쟁 난민 출신이다. 고향을 떠난 그의 가족은 결국 정착하지 못하고 2000년 스위스로 이주했지만 서유럽에서 유고 난민을 바라보는 시선은 차가웠다. 몇 달 되지 않은 스위스 생활을 청산한 그의 가족은 친척이 있는 미국에 터를 잡았다.

스위스에서도 축구선수로 뛴 이비세비치는 미국 고교 축구계를 평정한 뒤 2003년 명문 세인트루이스대에 진학, 미국대학체육협회(NCAA) 신인상과 올스타를 석권했다. 소문은 내전의 후폭풍으로 어수선한 보스니아까지 퍼졌다. 보스니아 21세 이하 대표팀에 선발된 그는 2004년 파리 생제르맹을 이끌던 보스니아 출신 바히드 하일로지치 감독의 눈에 띄어 유럽 진출에 성공했다.

장래성은 뛰어나지만 다듬어지지 않았던 그는 프랑스 2부리그, 독일의 아헨(1부)을 거쳐 지난해 2부리그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던 호펜하임과 인연이 닿았다. 인구 3500명의 소도시 호펜하임은 90년대 중반 조기축구 수준인 8부리그에서 출발, 승격에 승격을 거쳐 올 시즌 1부리그로 올라온 입지전적인 팀이다. 호펜하임 유소년팀 출신인 독일의 재벌 디트마르 홉 SAP 회장의 투자로 일어선 이 팀은 원석에 가까운 이비세비치에게 100만 유로(약 19억원)를 베팅했다.

투자가 비약적으로 늘었다고는 해도 바이에른 뮌헨 같은 빅 클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엷은 호펜하임의 선수층은 오히려 무명의 이비세비치에게 도움이 됐다. 지난 시즌 후보로 전전하던 그는 주전 공격수의 부상을 틈타 기회를 잡았고 경기장에서 골을 펑펑 터뜨렸다.

전란을 겪어본 그는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인생에는 축구보다 중요한 것도 있다. 감히 내가 뮐러의 기록을 깨리라 생각지 않는다. 그저 지금의 상황을 즐기고 싶다”며 성숙한 면모를 보였다.

장치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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