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산책] 씨름판 달구는 백승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 백승일이 훈련하다 잠시 쉬는 시간에 음악을 들으며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꾸밈없는 웃음에서 여전히 ‘소년 장사’의 모습이 묻어 나온다. 구리=신동연 기자

"물론 땡겨야죠."

백승일(28)이 사투리로 말했다. 늘 그러하듯 호방한 웃음과 거침없는 말이다. 오는 25, 26일 부산에서 열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유치 기념 씨름대회 첫 판에서 팀 후배인 '신세대 골리앗' 최홍만과 맞붙게 됐는데 어쩔 거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씨름판에서 '땡긴다'(샅바를 당긴다)는 말은 양보하지 않고 제대로 겨룬다는 의미다.

지난 19일 LG씨름단이 있는 경기도 구리시 LG스포츠파크 웨이트트레이닝장에서 만난 백승일의 표정은 밝았다. 이달 초 고흥장사 씨름대회에서 25개월 만에 백두장사 꽃가마에 올라탄 그다.

그의 얼굴에는 결승에서 '원조 골리앗' 김영현(신창)을 안다리 세 판으로 꺾은 그날의 감동이 아직 남아 있다. 그는 열일곱 나이에 천하장사에 올랐던 1993년과 지난 고흥대회를 지금까지 가장 기뻤던 때로 꼽았다. 93년 최연소 천하장사에 올라 '소년장사'라는 별명을 얻은 백승일은 그 뒤에도 천하장사에 두 번, 백두장사에 여섯 번 올랐다. 그런 그가 지난해 백두급 8위에 머무르는 등 2년 넘게 체면을 구겨 왔으니….

"항상 자신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될 듯 될 듯 하다가도 연방 아깝게 져서 열을 많이 받았지요."

"고흥장사 첫 판에서 태현이를 꺾으면서 자신감이 생겼어요."

백승일에게 이태현(현대.28)은 사무친 라이벌이다. 94년 부산 천하장사 결정전에서 이태현에게 진 뒤부터 성적이 썩 좋지 않았다. 반면 이태현은 세 차례 천하장사와 16차례 백두장사를 차지하며 '모래판의 황태자'란 별칭까지 얻었다.

그 이태현에게 빚을 갚고, 결승에서 김영현을 물리치기까지 피나는 훈련이 있었다. 그는 애초 달리기 선수였다. 큰 키에 마른 체격으로 순천 성동초등학교 육상부에서 단거리를 뛰었다. 당시 학교에는 씨름부도 있었다. 어느 날 100m 달리기를 막 끝낸 그를 씨름부 감독이 불렀다. "너 여기 와서 씨름 한번 해봐라." 백승일은 모래판에 있던 씨름부원들을 모두 이겼고, 그 다음날로 씨름 선수가 됐다.

순천 이수중을 거쳐 순천상고 1년 때 그는 청구에 스카우트돼 프로에 입문한다. 청구씨름단에 있으면서 대구 중앙상고를 졸업했다.

어린 시절 그는 찢어지게 가난했다. 가난과 가정불화 끝에 초등학교 3년 때 아버지가 집을 떠나고, 어머니(안순자.58)가 날품팔이와 식당일로 3남매(백승일은 막내)를 키웠다. 그런 어머니에게 그는 이제 1억원대의 연봉과 그동안 받은 상금 등으로 순천시내에 추어탕 집을 차려 드리려 한다. 곧 문을 연다. 상호는 '옛골'이다.

1m88㎝.145㎏에 발길이 300㎜, 허리둘레 46인치의 거구지만 그는 술을 못한다. 소주 반 병이 주량이다. 대신 쉴 때 그는 당구를 친다. 소위 '짠 200'이다. 팀 동료 모제욱.이성원.김기태와 일주일에 두번쯤 내기 당구를 한다.

백승일은 "올 연말에는 반드시 천하장사에 다시 올라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 뒤에 예쁘고 착하고 이해심 많은 처녀를 만나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최준호 기자<joonho@joongang.co.kr>
사진=신동연 기자 <sdy11@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