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폴란드 ‘음악 대통령’ 환희의 축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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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폴란드 바르샤바 국립오페라극장에서 열린 음악제에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국민 작곡가’ 펜데레츠키(사진(右)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류재준 제공]


이날 바르샤바 국립오페라 극장 밖에는 피켓을 들고 표를 구하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객석은 입추의 여지도 없었다. 연주회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두 번 울리고 청중 앞에서 사회자가 선언했다. “예루살렘의 일곱 개의 문.” 나흘간 음악제의 마지막 곡이었던 교향곡 7번의 제목이다.

모든 청중이 기립해 환호했다. 그들의 친구이자 대변인 그리고 영웅인 펜데레츠키가 무대에 올랐다. 그는 세 개의 혼성 합창단, 다섯 명의 독창자, 두 개의 오케스트라, 그리고 낭송자가 등장하는 이 거대한 곡을 직접 지휘했다. 금관 악기가 포효하는 동안 목관 악기들은 유영하듯 움직였다. 합창단은 13세기 이름 모를 폴란드 작곡가로부터 영감을 얻은 주 선율을 노래했다. 숨 쉴 틈 없는 음악은 70분 동안 지속됐다. 교향곡은 보통 4악장으로 이뤄져 있지만 이 작품은 7악장이다. 그의 지난한 삶을 말해주는 듯했다. 지휘자 로린 마젤마저도 “너무 방대해 연주하기 힘들다”고 했던 곡을 그는 통일감 있게 지휘해냈다.

◆‘약소국’의 자존심=펜데레츠키는 공산정권 시절 폴란드에서 서방세계의 러브콜을 받아 화제가 됐던 작곡가다. 동서 냉전이 심하던 1960~70년대에 그는 독일 에센 대학과 미국 예일 대학에서 동시에 교수로 초빙됐다. 이후 그는 현재까지 전 세계 20개가 넘는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분석가들이 “많은 실험적 기법이 한 작품에서 조화를 이룬다. 하지만 기술적 완성도 이면의 정신적인 바탕이야말로 그가 세계 음악계의 정상인 이유다”라고 칭했던 작품세계 덕이다.


그는 ‘히로시마의 생존자를 위한 애가’(1960), ‘성 누가 수난곡’(1966) 등으로 단숨에 세계 정상의 작곡가로 인정받았다. 바이올린에서 통상 쓰지 않던 부분의 현을 눌러 연주하거나, 여러 개의 음을 한꺼번에 눌러 내는(음군·音群) 등 현대 음악의 중요한 기법이 그를 통해 확립됐다. 음악사는 바흐·베토벤·브람스 등을 거쳐 그의 이름을 기록한다.

펜데레츠키와 폴란드는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이번 음악제에서 만난 그의 부인 엘지비에타는 “남편이 예일대에 재직하던 시절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폴란드의 시집이나 책을 꺼내 들고 사색에 잠겼다. 그는 항상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까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회상했다. ‘폴란드 진혼곡’(1984) 등에 이러한 그의 애잔함이 녹아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영토의 일부를 러시아에 빼앗기고, 공산화되는 과정에서 대학살 혹은 추방이 일어났던 자신의 조국에 대한 절절함. 폴란드 정부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 등에게 수여되는 ‘계관 예술가’ 칭호를 수여(1970년)함으로써 그에게 보답했다.

◆세계 각국의 ‘축하 사절’=75주년 음악제는 화려한 연주자들로 꾸며졌다. 아르토 노라스(첼로), 줄리안 라클린(바이올린) 등 솔리스트와 중국의 상하이 4중주단까지 초청됐다. 펜데레츠키는 오랜 음악 친구들을 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작곡가 강석희,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가 음악적 동료이자 오랜 친구로 초청됐다.

노 작곡가는 자신의 현악 4중주 3번을 초연한 상하이 4중주단이 무대에서 “이제야 새로운 변화를 시작하는 도전선상에 섰을 뿐”이라고 말했다. 정체를 두려워하며 도전에 헌신하는 펜데레츠키는 폴란드의 가치와 존엄성을 대변하는 상징이 됐다. 작곡가는 단순히 음악 작품을 몇 개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한 나라의 국민에게 행복감과 자랑스러움을 안길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이번 축제는 확인시켰다.  

바르샤바=류재준(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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