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드야 놀자] 부러운 미국 퇴직연금 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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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퇴직연금이 커지면 그 나라의 자본시장도 함께 안정된다고 합니다. 퇴직할 때까지 꾸준히 돈을 붓는 퇴직연금의 특성상 장기 투자의 관행이 자연스럽게 정착되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미국은 1970년대 중반 현재적 의미의 퇴직연금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미국 자본시장이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기본 20~30년은 투자해야 하는 퇴직연금 비중이 커지면서 자본시장은 웬만한 충격에도 큰 동요를 보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미국의 퇴직연금은 17조6000억 달러로 국내총생산(GDP)의 1.3배에 달합니다. 이 중 5조6000억 달러(32%)가 뮤추얼 펀드에 투자됐습니다. 개인퇴직계좌(IRA)와 확정기여형(DC) 등 주요 퇴직연금에서 투자된 돈만 계산한 규모입니다. 확정급여형(DB)과 퇴직연금 보험에서 투자하는 것까지 고려하면 퇴직연금을 통해 펀드에 투자하는 규모는 훨씬 클 것으로 추정됩니다.

5조6000억 달러는 전체 뮤추얼 펀드 시장의 46.6%를 차지합니다. 특히 주식형 퇴직연금 펀드는 전체 주식형 펀드의 59.4%인 3조9000억 달러인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미국 주식펀드 절반 이상이 20~30년 동안 돈을 빼지 않는 장기 투자 자금인 셈입니다.

다음 달이면 국내에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한 지 만 3년이 됩니다. 한국의 퇴직연금은 9월 말 기준으로 4조6000억원 규모입니다. 이 중 퇴직연금 펀드는 6102억원으로 전체 퇴직연금의 13%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퇴직연금 펀드가 전체 펀드시장(공모 기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02%에 불과합니다. 근로자 개인이 운용을 책임지는 확정기여형과 개인퇴직계좌에 대해 손실이 날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주식펀드에 투자할 수 없도록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주식시장이 침체 양상을 보이자 국내에서는 주식 펀드에서 대규모로 자금이 빠져나가는 ‘펀드 런’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도 주가가 하락하자 퇴직연금 펀드에서 자금 이탈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한 펀드 런에 대한 공포 분위기와는 많이 다른 모습입니다. 미국 주식펀드에서 자금이 빠져나가는 것은 위험 관리 차원에서 부분적으로 자산 배분 비율을 조정하는 것일 뿐입니다. 주식시장이 안정되면 언제든지 돌아올 내부에서의 자금 이동입니다.

퇴직연금 제도를 30년간 운영해 온 나라와 이제 3년밖에 안 된 나라를 동일하게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미국과 같은 퇴직연금 시장이 부러운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최상길 제로인 전무(www.funddocto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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