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부도회오리>한보담당 市銀3人 익명요구 숨은 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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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매일 저녁 마감시간이 지난 후 위에서 오더가 내려오길 기다려야 했다.그래야 한보어음을 부도낼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었다..막아주라'는 지시가 떨어지고 신규대출 한도가 내려오면 어음을 막아줬다.오후9~10시는 보통이고 자정 가까이 될때도 허다했다.하루 하루가 피를 말리는 날들이었다.” “이러는 동안 은행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더 늦기전에 부도난게 오히려 다행이다.계속 이런 식으로 갔더라면 은행들이 아예 거덜났을게다.” 한보에 엄청난 돈이 물린 은행들의 한보담당 실무자들은“한보가 부도나기 직전까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았다”며.편법'의 현장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익명을 요구한 3명의 시중은행 한보 담당자들로부터 숨은 얘기를 들어봤다. -최근 한보어음이 처리된 과정을 자세히 말해 줄 수 있는가. “한보철강이 발행한 어음들이 매일 지점에 돌아왔지만 한보는 마감시간인 오후4시30분까지 막지 못했다.그러면 일단.(부도처리)연장'을 걸어놓고 본점에 이 사실을 알린뒤 지시를 기다렸다.대출허가가 떨어지면 이 돈으로 어음을 결제했다.부 도직전까지거의 매일 밤 이런 과정이 되풀이됐다.” -기업들이 어음을 못막으면 모두 본점에 알리는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보통은 오후5~6시 정도까지 기다리다가 그냥 부도처리한다.오래 거래한 대기업은 가끔 대출을 일으켜부도를 막아주긴 하지만 한보처럼 거액을 2주일 가까이 연속 막아준 일은 드물었다.” -그런데 왜 유독 한보어음은 본점에 보고하고 계속 막아줬는가. “한보의 부도결정은 실무진의 권한 밖이었다.또 부도를 안내려면 신규대출을 일으켜야 하는데,지점 전결권에는 한계가 있다.거액 대출은 본점에서 한도를 줘야 지원이 가능하기 때문에 당연히본점에 보고,그 결정에 따라야 했다.” -결제 규모는 어느 정도였나. “은행마다 달랐다.한 곳에서 하루에 적어도 수십억원,많을 때는 수백억원도 있었다.” -그 정도를 매일 신규대출로 막아줬단 말인가. “그랬다.그러다 보니 은행대출이 엄청나게 불어난 것이다.” -외부의 압력은 없었나. “우리같은 실무자들이 그것까지 알 수야 있겠느냐.하지만 이 정도로 비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뭔가가 있구나'하고 추측할 뿐이다.” -높은데서 외압이나 부탁이 없고서야 어떻게 그많은 돈을 한기업에 계속 대출할 수 있나. “우리나라 은행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하다.그러나 뒤에와서는 스스로 물려들어간 측면도 없지 않은 것 같다.” -다른 은행들이서로 협의했나. “실무자끼리 전화로.그쪽에서는 어떻게 하나'하고 서로 묻곤 했다.그러나 정보수집 정도의 수준이지 의사결정에 특별한 영향을주지는 못했다.” -언제부터 이런 일이 벌어졌나. “지난해 말부터.한보 자금이 어렵구나'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제때 돈을 못막는 일이 한두번씩 생겼났다.그러다 지난 1월 중순부터는 상황이 아주 나빠졌다.그 전에만 해도 어음을 못막으면 한보 관계자들이.몇 시간만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고,또늦게라도 돈을 가져왔는데 1월 중순께부터는 아예.돈이 없다'는대답이었다.” -어떻게 한보에 이렇게 엄청난 돈이 나가게 됐는가. “은행 입장에서 한보같은 기업이 담보만 확실하면.환영받는고객'이다.다른 대기업과 달리 한보는 이자율 불문( 問)이었다.떼이지만 않으면 수익이 아주 좋은 곳이었다.처음에는 정상적으로 부동산이 담보로 제공됐다.” -담보가 있다고 모두 대출해 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이다.하지만 한참동안은 별 문제가 없었다.이미 빚이 엄청나게 늘어난 후에는 은행들이 자승자박(自繩自縛)한 꼴이 된 것 같다.” -결제에 돌아온 어음은 주로 어떤 것들이었나. “최근에는 돈을 빌리기 위해 발행한 융통어음이 많았다.” -변칙적인 방법으로 지원하다가 나중에 문제가 터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가. “실무적인 차원에서는 불법이 아니었다.결제시간을 늦춘 것이 다소 문제가 되긴 하겠지만 가끔 있는 일이다.거액대출을 결정하는 과정을 지적한다면 몰라도 결제단계의 기술적 과정에는 문제가없었다.” 〈경제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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