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탄자위의 무지개빛 영상詩 이란영화 "가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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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영화로 시를 쓴다.
구슬과 현란한 무늬로 장식된 강렬한 원색의 전통의상.그 소매끝에서 뻗어나온 유목부족 처녀의 손.여린 손끝이 페르시아 양탄자를 짜나갈 때 벌판에서 양이 태어난다.양의 울음은 직조기 소리와 어우러져 그대로 바람소리가 된다.다른 부족 의 건장한 남자가 멀리서 그 모습을 보다 한숨을 뒤로하고 사라진다.직녀의 눈에 비친 그의 뒷모습은 둘이 맺어지는 꿈속의 장면들과 함께 마술처럼 카펫 귀퉁이 문양으로 변한다.
이란의 혁명후 세대를 대표하는 감독의 한명인 모센 마크말바프의 영화.가베'의 내용이다.지난해 5월 칸 영화제 특별부문에 초청돼 팬들에게 충격과 황홀감을 안겨줬고 9월엔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돼 그의 친구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만든. 네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와 함께 이란영화 붐을 일으키기도 한 영화다.가베는 이란어로 양탄자란 뜻인데 영화속 여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다.이 작품이 유럽에서 개봉되면서 평론가들과 영화팬들로부터 열광적인 호평을 받고 있다.지난해 11월 말 런던에서 개봉된 이영화는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빠질 수 없는 장기상영작품으로 자리잡고 있다.
평론가들은.이란식 시(詩)영화'라는 새로운 장르가 등장했다고극찬하고 있다..가베'는 줄거리와 장면.스타일이 단선적으로 통합된 고전적인 할리우드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실제론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생각과 상상의 나래를 영상을 통해 펼치는 것이 문학으로 치면 한편의 시를 연상케한다.아울러 이란민족의 전설.우화.의상.풍속,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영화를 끌어가고있어.이란식'이란 말도 붙는 것이다.어떤 관객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이해가 쉽다는 점에서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 철학과열정을 다루는 유럽식 예술영화와도 차별된다.아르메니아 출신 옛소련의 대가 세르게이 파라자노프감독을 언뜻 연상시키는 영화풍인데 그보다 소박하고 단아하다는 점에서 다르다.유럽의 어떤 영화제에 가봐도 그의 영화는 온통 화제다.특히 유럽 유학중인 제3세계 영화학도들에게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그의 영화는.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란 격언을 실제로 보여줬기 때문.
따라서 그가.가베'에서 보여준 영화미학은 한편에서 끝나지 않고 전세계적으로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을 것이라는게 평론가들의 전망이다.이미 그는 브라질 상파울루영화제와 그리스 테살로니케영화제에서 감독특별주간을 만들어준 것을 비롯,전세계 30여 영화제로부터 초청받고 있으며 합작제의도 몰리고 있다.하지만 정작 그의 조국인 이란에서는.이슬람 전통에서 탈피한 괴상한 영화'란이유로 상영금지돼 팬들을 안타깝게 만든다.
지난해 8월 로카르노영화제에 또다른 신작.빵과 꽃'을 들고온마크말바프감독을 만났다.그는 “내 영화세계의 중심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 환경과 그 사람들”이라고 말했다.서구의 평론가들이 말하는 내용에 대해서는“그것들은 내 영화 의 겉을 싸는포장”이라고 대꾸했다.
그는 이란회교혁명전인 팔레비 시절,무장투쟁을 위해 경비 경찰관의 권총을 빼앗으려다 체포돼 감옥살이를 한 경력이 있다고 고백했다..빵과 꽃'은 이 사실을 바탕으로 현재와 과거,현실과 환상을 섞어 만든 영화로 로카르노영화제 특별상을 받았다.
.사람이 나비 꿈을 꾼 것인지,나비가 사람 꿈을 꾼 것인지'란 말을 떠오르게 하는 그의 동양적 환상필치는 앞으로 세계영화계에서 중국에 이어 이란영화붐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전망된다.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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