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론

은행권 구조조정 시급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최근 정부의 유동성 공급조치와 거듭되는 금리인하 요구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신용경색 현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재 전개되고 있는 국제금융위기와 경기침체의 악순환 고리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이해가 필요하다.

첫째, 헤지펀드를 비롯한 주요 금융기관의 부채축소 및 청산작업이 아직 진행 중이며, 당분간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지속된다는 점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채권의 대부분을 떠안았던 투자은행 및 이들과 연계된 헤지펀드 규모는 현재 1조6500억~2조 달러로 추정되며, 내년 중에 약 1조 달러 규모로 축소될 것이라 예상된다.

그동안 세계적으로 다양한 상품의 처분이 이루어지고, 특히 신흥시장에서 외화유출이 가속화됐던 주요 배경이다. 올해에만 한국시장에서 빠져나간 외국인 투자액이 46조원에 이르고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부족한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한 자금회수 노력이 전 세계 금융시장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 투자은행으로 분류되는 도매금융회사에서 시작돼 실물시장 경기침체로 전이됐던 불안요인이 다시 소비자금융 등 상업은행의 부실로 전이되고 있다는 점이다. 신용카드 부문의 부실과 자동차대출 분야의 부실이 가장 심각하다.

 몇몇 주요 은행은 분기별로 대손충당금을 적립해가고 있지만 경기침체가 가속화할 경우 기존의 부실 발생액과 더불어 제2, 제3의 씨티은행이 출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700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마련해 도매금융회사들을 구제하려 했던 미국 정부가 3500억 달러를 소비자금융 부실에 투입하려는 시도에서 그 절박성을 엿볼 수 있지만, 이 정도로 충분할지는 의문이다. 실물부문의 침체가 이제 막 시작에 불과한 시점에서 다시 소매금융시장의 불안이 복합적으로 세계시장을 강타하고 있는 게 현재의 실상이다.

11년 전 외환위기와 현재의 금융·실물위기의 다른 점이 있다면 외환위기는 한국과 아시아의 문제였던 반면 지금의 위기는 전 세계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만큼 실타래 풀기가 더 어려워졌다. 국내에서 중소기업 대출, 건설사의 대주단 협약 가입, 조선업종 등으로 시작된 구조조정 논의는 아직까지 은행의 부실로 현실화하지 않았지만 장기적으론 국내은행의 부실화 쪽으로 연결되고 있다.

 비록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 시행을 1년 정도 연기했다고는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 부실자산을 현실화해 자기자본비율을 낮추려는 금융회사는 없을 것이다. 보유자산 부실로 인해 금융회사의 자기자본비율이 8% 이하로 떨어진 뒤에 구조조정에 나설 경우 관련 정부부처는 책임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정부의 조치가 빠르면 빠를수록 국가재정의 부담도 그만큼 줄어들 수 있다는 점이다. 이제는 정부가 구조조정에 대한 기본원칙을 가지고 직접 나서야 할 시점이다.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은 BIS 자기자본비율이 기준에 미달했을 때만 할 수 있다는 논리에서 벗어나 ‘단호한’ 선제조치를 단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의 선제조치가 효과적이려면 충분한 자금확보는 물론 은행권과 구조조정을 집행하는 정책담당자들에게 충분한 재량권을 보장해주고 확실한 면책조항을 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근 미국의 구제금융 확보 및 집행과정에서 재무부 관리들에게 면책조항을 명시화한 것은 좋은 선례다. 이러한 면책사유를 보장하려면 여야 정치권의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

미국이 금융위기의 초기 대응과정에서 머뭇거렸던 데 비해 약간의 실기는 있었지만 유럽의 대응이 ‘단호하고 충분히’라는 정책에서 효과를 얻었던 점을 우리 정부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장범식 숭실대 교수·경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