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한 제품 고르려 진열대 흩뜨리기 일쑤 유통업체 속앓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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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집 근처 백화점 식품매장을 찾은 주부 한영애(49.서울동교동)씨는 앞서 가던 한 손님이 우유냉장고 안으로 손을 쑥 밀어넣어 뒤쪽에 놓인 우유를 꺼내 담는 모습을 보았다.
“아니 저 사람은 앞에 있는 것 놔두고 왜 힘들게 뒤에서 꺼낼까.” 한씨는 이상하다 싶어 냉장고 안을 한동안 유심히 살펴봤다.그랬더니 같은 회사에서 나온 우유 제품인데도 제조일자가 서로 다른 것이 눈에 띄었다.
가장 뒷줄에 놓인 것은 유통기한까지 5일,중간 것은 4일 남아 있는데 비해 가장 앞줄에 진열된 것은 2일에 불과했다.뒤쪽으로 갈수록 신선한 셈이었다.
옆에 진열된 주스 판매대를 살펴봤더니 우유냉장고와 마찬가지였다. 어묵판매대에서는 .혹시나'싶어 아래쪽에 포개논 똑같은 제품을 꺼내보았다.놀랍게도 이 역시 잘 안보이는 바닥쪽의 것들이보다 신선한 것이었다.
한씨 같은 소비자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냉장식품들의 경우 이처럼 먼저 생산된 제품이 먼저 팔리도록 진열하는 이른바.선입선출'(先入先出)이 절대원칙이다.
유통기한 날짜가 판매대에서 한눈에 노출되면 소비자들은 당연히최신제품을 찾게 되고,이 경우 하루라도 더 오래된 제품은 결국유통기한까지 안팔리고 반품처리되기 때문이다.물론 이는 속임수가아니라 전세계에서 통용되는 판매기법이다.
하지만 최근 수년동안 이러한 비밀(?)이 많이 새나가면서 뒤쪽이나 아래쪽의 새 상품만을 골라 가는 소비자들이 크게 늘어나유통업체들은 고민중이다.이들이 얄밉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서울 신촌 그레이스백화점측은“우유.주스 제품은 약 5%,어묵류등의 경우 10% 이상의 소비자가 새로운 것을 뒤져가는 편”이라며“반품이 조금 느는 것을 떠나 빼내가는 과정에서 진열을 흐트러뜨리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밝혔다.
아울러 판매대 상품들의 유통기한이 들쭉날쭉해져 업체로선 매일유통기한 점검작업을 벌여야 하는 부담이 생기고 자칫.어디에는 유통기한이 임박한 제품들만 있다'는 평을 얻을 위험성도 있다.
사정이 이쯤에 이르자 유통업체들은 또다른.묘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예컨대 매장내 판매대를 두개로 나눠 새 제품은 조금 후미진 판매대에 두다 유통기한이 촉박해지면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판매대 쪽으로 옮기는 전략을 쓴다.또는 판매사원들이 옆에서있다가 소비자가 뒤질 시간이 없도록 상품을 대신 집어 주는 방식을 동원하기도 한다.
어묵류를 주로 판매하는 어느 회사는 소비자들의 허를 찌르는.
기습작전'을 쓰기도한다.세번에 한번 정도는 새 제품을 오히려 앞쪽에 진열함으로써.새 제품이 항상 위쪽이나 아래쪽에 있다'는고정관념을 깨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들로도 당장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해 업체들은 새로운 묘안 짜기에 고심중이다.
〈이효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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