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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클로즈 업] "外孫에 복 뺏길라" 며느리방엔 딸들 출입금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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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사람들이 꼽는 4대 명당이 있다. 경주의 양동(良洞), 안동의 하회(河回), 안동의 내앞(川前), 봉화의 닭실(酉谷)이 그곳이다. 한결같이 산과 물 그리고 들판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입지조건이라서 경치도 좋고 먹고 살기도 좋은 곳들이다.

그 중에서 경주의 양동마을은 '조선시대의 베벌리 힐스'에 비견될 만큼 품격 있는 마을이다. 보통 한옥마을은 평지에 자리잡는 경우가 많은데, 양동의 한옥들은 특이하게도 4개의 언덕 이쪽 저쪽에 자리잡고 있다. 동네의 지세가 물(勿)자 형국으로 생겼기 때문이다. 약 70여 채의 한옥이 물(勿)자처럼 생긴 4개의 언덕마다에 각기 다른 방향을 보고 자리잡아 동네 입구에 처음 들어서는 사람은 입체적인 조형미를 느낀다. 이채로운 광경이다.

이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 경주 손씨 대종택인 서백당(書百堂)이다. 550년의 역사를 가진 고택이다. 여기에도 역시 산실이 있다. 통상 '며느리방'이라고 부른다. 며느리 외에 다른 사람은 거처할 수 없는 방이기도 하다. 서백당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면 이 산실에서 혈식군자(血食君子) 3명이 태어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혈식군자란 서원에 배향되는 인물이다. 서원에 배향되는 인물의 제사상에는 불로 익히지 않고 반드시 날것으로 된 음식(血食)이 올라가야 한다. 그러한 제사상을 받는 인물이 혈식군자다.

이 집의 산실에서 제일 먼저 배출된 혈식군자는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1463~1529)이다. 상주목사로 재직할 때에 기억에 남을 만한 선정을 베풀어 상주 사람들이 그의 생존시에 생사당(生祠堂)을 지어줄 정도였다. 그 다음에 태어난 인물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다.

손씨 집 딸이 여강 이씨 집안에 시집을 갔다가, 해산달이 가까워 오자 친정인 서백당 산실에 와서 아기를 낳았는데, 그 아기가 회재였던 것이다. 손씨 입장에서 볼 때는 서백당 산실에 배정된 3장의 티오 가운데 한장이 여강 이씨 집안으로 넘어간 셈이다. 이후부터 서백당 산실에는 출가한 딸들이 출입할 수 없었다. 아기를 낳으러 친정에 돌아오면 산실에서는 몸을 풀 수가 없었고, 다른 방에서 해산을 해야만 했다.

근래에 이르기까지 이 금기는 철저하게 지켜졌던 것 같다. 거기에는 양동마을의 풍수도 작용했다. 왜냐하면 양동은 외손발복(外孫發福)이 잘 되는 터라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원래 양동은 풍덕 류씨들이 제일 먼저 살았고, 그 다음에는 류씨의 사위로 들어온 경주 손씨들이 자리를 잡았고, 그 다음에는 손씨의 사위인 여강 이씨들의 후손이 번성했던 것이다.

딸 또는 외손들이 잘되는 터는 두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는 백호 자락이 잘 생겼거나, 또는 백호에서 갈려 나간 산줄기가 여러 가닥인 경우다. 풍수에서 청룡은 남자 또는 장남, 백호는 여자 또는 차남으로 보는 탓이다. 勿자의 형태를 자세히 뜯어보면 왼쪽인 청룡보다는 오른쪽의 백호 줄기에서 갈려 나간 맥이 여러 갈래로 뻗은 형국이다. 백호가 한 가닥이 아닌 여러 가닥으로 분화되면서 그 분화되는 지맥마다에 혈자리가 맺혔다. 특히 서백당의 위치에서 보면 백호가 세겹으로 이루어져 있는 셈이다.

둘째는 손방(巽方)에 잘생긴 봉우리가 있는 경우다. 손방이라 하면 동남쪽의 방향을 가리킨다. 집터에서 보았을 때 동남쪽 방향에 잘생긴 봉우리가 자리잡고 있으면 딸들이 잘 된다고 해석한다.

그 이유는 팔괘 가운데 하나인 손괘(巽卦)가 여자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양동마을의 풍수는 이 두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보니, 외손발복지라고 소문이 났던 것이고, 딸들을 산실에 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출가한 딸들을 산실에 잘 들이지 않는 관례는 서백당뿐 아니라, 내앞의 의성 김씨 대종택이나, 고성 이씨 임청각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해산달이 가까워진 딸들은 친정집 산실의 영험함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왕이면 산실에서 몸을 풀려고 노력했다.

이문열의 단편소설 '홍길동을 찾아서'를 보면 영남 사대부 집안의 산실을 둘러싼 이야기가 주제로 되어 있다. 이 단편소설을 보면 정기가 뭉쳐 있는 친정집 산실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아기를 낳으려는 딸과, 이를 막으려는 친정집 식구들 간의 긴장이 묘사돼 있다.

이문열은 재령 이씨지만, 외가는 의성 김씨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대 중반의 백수시절에 외갓집인 내앞의 의성 김씨 종택에서 1년가량 생활했던 적이 있으며, 그때 전해들은 외갓집의 산실 이야기에다 어느 정도의 픽션을 가미해 쓴 소설이 '홍길동을 찾아서'다.

조선 전기까지는 딸들도 재산상속을 받을 수 있었고, 족보에도 외손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등재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로 오면서 딸들은 재산상속에서 제외됐고, 족보에서 외손들이 제외되는 변화가 생긴다.

산실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딸들이 재산상속에서 제외되는 조선 중기 이후로 산실 출입을 제한받지 않았나 싶다. 산실의 정기도 그 시대의 사회경제적인 배경과 무관할 수 없다.

조용헌 원광대 초빙교수.江湖東洋學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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