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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발업체들 돈·물량 가뭄 이중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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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호 06면

20일 오후 경남 통영시의 한 조선소 야드(작업장). 직원들의 출퇴근용 자가용이 입구 3~4㎞ 앞까지 길게 늘어선 가운데 쉴 새 없이 들락거리는 덤프트럭 부대들로 활기가 넘쳐났다. 하지만 날이 어두워질 무렵 회사 문을 나서는 근로자들의 얼굴엔 근심이 서려 있었다. 협력업체에 소속돼 A조선소에서 일하는 용접공 김모(30)씨는 “지난주 A조선소가 부도났다는 얘길 들었다. 내일 월급이 안 나오면 바로 그만둬야겠다”고 말했다. “조회 때 회사 간부가 그런 말을 하더라. 공정이 늦어져 배를 못 밀고(진수) 있다”는 제법 구체적 얘기까지 전했다. 회사 측은 ‘근거 없는 마타도어’라며 펄쩍 뛰었다. 3년치의 일감을 따놓고 있고, 지난달에만 유조선 두 척을 수주하는 등 경영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잘나가던 조선, 갑자기 왜

최근 2~3년간 신생업체가 잇따라 들어서며 국내 조선업의 유망주로 떠오른 통영의 분위기는 이같이 뒤숭숭했다. 구조조정이 임박했다는 불안감이 조선사와 근로자 모두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 통영엔 수주 잔량 기준 세계 100위 안에 드는 조선소가 5개나 몰려 있다. 조선업이 호황이던 2002년 이후 신조(선박 제조)에 뛰어든 업체들이다.

주로 통영·거제 지역 조선소에 금속 기자재를 납품하고 있는 S금속 관계자는 “지난 9월 이후 이곳 조선소들이 대금 결제를 현금에서 어음으로 바꾸고 있다”고 전했다. B조선소의 한 간부는 “수주 취소 같은 상황에 대비해 보수적 자금 운용을 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통영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서남해안 일대와 경남 창원·진해 등의 군소 조선소는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형편이다. 이들 업체는 조선업 호황의 끝물을 타고 주로 벌크선 제조에 뛰어들었다. 돈을 빌려 시설 투자를 한창 하고 있는 시점에서 손님이 끊기고 돈이 마르는 이중고를 겪게 됐다. 벌크선 운임을 나타내는 발틱운임지수(BDI)가 고점 대비 90% 넘게 추락하며 신규 발주는 사실상 중단됐다. LIG투자증권 김현 애널리스트는 “선주들의 발주계약 취소가 늘어나 10월 말까지 세계적으로 154척의 벌크선 신조 계약이 취소됐다”며 “중소 조선사가 쉬쉬하고 있지만 국내 수주 물량 중에서도 취소되는 경우가 하나 둘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미리 받아둔 계약금과 선수금에 대해 은행이 환급보증을 해주지 않으면서 자금난도 본격화됐다. 이 때문에 8월 전남 목포 삽진산업단지에 있는 C&중공업이 조업을 중단한 데 이어 동남권의 O·J조선 등이 부도설에 시달리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몇몇 조선소는 돈이 없어 선박 건조를 중단하는 지경”이라고 말했다.

대형사들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국내 5대 업체는 3년 반 내지 4년치 물량을 미리 확보하고 있다”며 “수익성은 다소 떨어지겠지만 위기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고 강조했다. 대형사들은 중소형사와 달리 LNG 운반선과 시추선 등 고가 선박에 집중하고 있다. 또 배를 주문한 해운사들의 규모가 크고 재무상태도 좋아 수주 취소가 현실화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금융권이 마련한 조선업 구조조정도 부실 중소사를 정리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금융권은 이들을 A∼D등급으로 나눠 A, B등급은 살리고 C, D등급은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이나 퇴출 대상에 올릴 방침이다. 중소 조선사들은 강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은행이 정상적 자금지원을 안 해 생긴 문제를 조선사들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는 주장이다. 통영의 한 조선소 임원은 “어떻게 건설사와 조선사를 똑같은 잣대로 평가하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아파트를 분양하겠다고 해놓고 못 파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우리는 일감을 갖고 있고 자금줄만 터주면 문제가 없는데도 도매금으로 취급당한다”는 하소연이다.

대우증권 성기종 애널리스트는 “내년 신규 주문이 지난해의 절반 수준으로 급감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2006년 말부터 새로 생긴 조선소에 대한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면서도 “국내 건조량 가운데 중소형사 비중이 15%가량에 불과해 국내 조선업의 위기로 해석할 일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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