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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54. 한·일 월드컵(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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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2002 월드컵 유치를 위해 이탈리아의 마테레사 FIFA 부회장(左)을 만났다. 필자(왼쪽에서 둘째) 오른쪽은 이탈리아올림픽위원회 위원장.

세계 3대 스포츠 이벤트는 올림픽·월드컵축구·세계육상선수권을 꼽는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치른 한국은 2002년 월드컵을 공동개최했고,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도 유치, 3대 이벤트를 모두 치르는 국가가 됐다. 대단한 일이다.

95년에 한국은 두 대회 유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과 월드컵 축구였다. 아시안게임은 5월에 결정되고, 월드컵 개최지 결정은 6월이었다. 경남중 시절 축구선수를 했던 김영삼 대통령은 축구에도 관심이 있었고, 자신의 텃밭인 부산에 선물도 주고 싶어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었다.

2002년 월드컵축구는 일본이 이미 유치 신청을 해놓고 아벨랑제 FIFA(세계축구연맹) 회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 축구는 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바 있고, 프로축구를 출범시키면서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신만만하게 달리고 있었다.

정몽준 축구협회장이 아시아축구연맹 회장에 당선되면서 FIFA 부회장이 됐다. 정 회장은 눈을 세계로 돌렸다.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위해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국내 사정은 월드컵 유치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일본이 벌써 저만치 앞서있는데 뒤집기가 가능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초반에는 축구협회와 현대 그룹을 중심으로 진행이 됐다. 그러다 곧 유치위원회가 발족되면서 이홍구·구평회 유치위원장, 이민섭·김영수 체육부 장관 등이 총동원됐다. 중앙일보 보도에 의하면 구평회 위원장은 340억원의 유치비용을 모았다고 했다. 나도 사마란치의 측근인 멕시코의 카네도 FIFA 부회장, 이탈리아 마테레사 부회장 등을 만나러 뛰어다녔다.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AISF) 관계로 블라터 FIFA 사무총장(현 회장)과는 절친한 사이였고, FIFA 공보관은 GAISF 공보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부산 아시안게임 유치가 먼저였다. 양쪽에 힘을 분산하다가 자칫 둘 다 놓칠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그 사정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은 내가 월드컵 유치에 소극적이라고 비판했다. 국회 지원특위에서 고 이주일 의원이 “체육회장은 어떤 축구행사에 가본 적 있느냐”고 질타할 정도였다. 정초에는 정몽구 회장이 “동생(정몽준)을 잘 도와달라”며 집으로 전화를 한 일이 있다. 그때 축구회장 선거가 있었는데 반대파들이 내 이름을 팔았던 모양이다. “정 회장이 잘 되는줄 알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했다.

한국과 일본이 맞붙은 중요한 선거를 보면 한국은 국가 총력전이었고, 일본은 목적 기능이나 지역 중심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방한하는 FIFA 관계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한국의 월드컵 유치 당위성을 설명했다. 한 번은 한국의 준비상황을 살피러 온 FIFA 실사위원들을 청와대로 불러 개최 당위성을 설명하니 “우리는 기술적인 타당성만 조사하러 온 사람들로서 개최지 결정에는 아무 영향이 없습니다”라고 해서 옆에 있던 내가 당황했다.

김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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