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대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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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왕조가 바뀌었지만 끝내 초야에 묻혀 충절을 지킨 고려 말의 신하 셋을 일컫는 말이 삼은(三隱)이다.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다. 셋 모두 숨는다는 의미의 은(隱)이라는 글자 앞에 짐승을 기른다는 목(牧), 채마밭의 포(圃), 성정을 가꾼다는 야(冶)라는 글자를 붙였다. 때로는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숨는다는 것은 도피적 성향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사실은 세속의 명리를 떠나 자유분방함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번뇌와 의혹을 없애 욕망의 굴레를 떠난 자유인의 경계를 일컫는다.

그러나 숨는 행위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 동양에서는 그 행위의 작고 큼을 구별했다. “작게는 초야에 숨는 것이요, 크게는 시정에 몸을 숨기는 것(小隱隱于野, 大隱隱于市)”이라고 했다. 다른 판본에는 크게 숨는 것과 중간치를 구별해 “적당하게는 시정에 몸을 숨기는 것, 크게는 벼슬자리에 숨는 것(中隱隱于市, 大隱隱于朝)”이라고 적었다.

본래 욕심을 털고 명예나 이익을 멀리하는 것이 이런 은자(隱者)들의 궁극적 목표다. 초야에 묻히는 것보다는 세속의 욕망이 들끓는 시정의 거리, 권모와 술수가 춤을 추는 벼슬자리에서 자신을 통제한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일 게다. 크게 숨는다는 대은(大隱)은 그래서 의미가 더 크다.

요즘 한국에도 은자들이 많다. 그러나 욕심을 멀리하는 본래의 은자 면목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욕심을 챙기려 자리 속에 숨어드는 사람들이 많아서 문제다. 숨는 행위를 거꾸로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각종 공기업 직원들의 비리가 터져 나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요즘은 혹심하다. 번듯한 자리에 묻혀서 국고와 혈세를 챙기니 이들을 비뚤어진 작은 은자라고 해야 할지, 중간치 은자라고 해야 할지 헛갈린다.

공당(公黨)에 몸을 담고서 자신의 비리 혐의를 막아내는 데 분주한 전직 김민석 의원은 대은의 역방향 실행자다. 민의가 반영된 민주당이라는 간판 아래 숨어 혐의를 가릴 수 있다고 판단한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다.

검찰이 지적한 혐의가 사실이라면 민주당이 더 문제다. 공당이면서 범죄 혐의자를 은닉하고 방조하는 죄를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법 앞에 더 겸손해져야 한다. 여당에 식상한 유권자들의 눈길이라도 잡으려면 말이다.

유광종 국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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