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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으로가는간이역>10.금곡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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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말하라.이 늙고 병든 백치여인이 누구인가.”(정복근 작.한태숙 연출,연극.덕혜옹주'중에서) 어떤 이의 삶을 두고.회한과영욕으로 가득했다'고 할 때,많은 경우 그 것은 단지 한 개인으로서 생의 부침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의 운명으로부터 누군들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하물며 쇠락해가는 왕조의 마지막 칸에 탄 여린 여인임에랴. 1912년,고종 황제는 귀인 양씨와의 사이에 유일한 딸 덕혜를 얻는다.
그때 고종의 나이 예순.황후 민비가 아닌 귀인과의 사이에 태어났기에 덕혜는 공주 대신 옹주라는 칭호를 받았다.
나라를 잃은 황제.한때는 영화로웠으나 이제 자신의 대에서 소멸해가는 왕조를 바라보는 늙은 황제에게 어린 딸 덕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염둥이였다.
성북역에서 기차로 25분.낡은 비둘기호를 타고 가면.이제 도심을 벗어났구나'싶을 때쯤 다시 새로운 도심이 시작되는 곳,경기도남양주시금곡동에 금곡역(金谷驛)이 있다.
금곡역에 내려 길을 건너면 마주치는 홍유릉(洪裕陵).홍유릉은고종과 황후 민비를 합장한 홍릉(洪陵),순종과 황후 민씨를 합장한 유릉(裕陵)이 함께 자리한 곳이다.
오후5시.홍유릉으로 가는 길에 바람이 따라왔다.바람은 능의 앞마당에서 몸을 일으켰다.
초라한 매표소 입구를 지나 사람없는 잔디밭길을 거슬러 따라온바람은 주위를 몇번 두리번거리더니 이윽고 능 뒤쪽 언덕으로 사라졌다. 찾는 이 없는 초라한 왕릉.비록 소멸한 왕조의 나라잃은 왕이 묻힌 곳이라고는 하지만 이토록 볼품없고 쓸쓸할 수 있는가. 능에는 그 흔한 안내 팸플릿 한 장 없다.먼 길 걸어와목마른 이가 음료수 한 모금 사 마실 매점 하나 없다..찾는 이가 없어'필요치 않단다.역사의 한 뿌리를 우리는 이렇게 대접하고 있다.
홍유릉 뒷길을 걸어 20분 남짓.으슥한 그 곳에 덕혜옹주의 묘가 있다.황제의 묘를 찾는 이 없는데 누가 옹주의 묘를 찾아오겠는가.언제 다녀갔는지 누군가 놓고 간 꽃다발 하나 시들어 겨울 바람을 견디고 있다.
여덟살때 아버지 고종을 잃은 덕혜는 열세살이 되자 일본으로 끌려간다.낯선 이국땅,원수의 나라 일본에서 오빠 순종과 친모 귀인 양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잇따라 접한 덕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실성'하고 만다.얼굴에 어떤 표정도 띠지 않는 조발성 치매증.
일제는 그런 덕혜를 대마도 번주의 아들(宗武志)과 결혼시킨다.그때 덕혜의 나이 스무살.그렇게 한 결혼이 행복할리 없었다.
딸(宗正惠)하나를 낳고 이혼했다.
멸망한 왕조의 후예로 끌려와 패전국 일본에서 어려운 삶을 꾸리던 덕혜가 조국으로 돌아온 것은 1962년.떠난지 37년만이었다. 그토록 예쁘고 영민했던 열세살 소녀.그러나 이제 아픈 기억과 병마에 짓눌린 말없는 51세 노인의 모습이었다.유일한 혈육이었던 딸이 결혼에 실패하고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한 후였다. 낙선재에 칩거,찾는 이 없고 누구를 찾지도 않는 삶을 이어가기 27년.89년 4월21일,.마지막 공주'덕혜는 세상을떠났다.77세.
.찾는 이가 없어'철책을 두르고 철문을 걸어 막아둔 덕혜의 묘.차마 위로의 인사 한 마디 못하고 묘를 나서자 관리인이 다시 굳게 문을 걸어 잠궜다.

<금곡=최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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