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드 소송 판례 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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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증권사가 역외펀드를 팔면서 선물환 계약을 따로 맺도록 권유했지만 정작 판매 직원조차 위험성을 모른 경우도 있었다. 법무법인 한누리 홈페이지에 글을 올린 한 투자자는 “한 운용사의 중국 역외펀드에 2000만원을 넣었다가 대부분을 날렸다”며 “판매 직원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자기도 잘 모르겠다며 본점에 확인해 보고 알려 주겠다고 하더라”며 울분을 토했다.

우리파워인컴 투자자 비상대책위원회 소속 투자자가 14일 서울 회현동 우리은행 본점을 찾아가 은행 측이 투자 위험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채 펀드를 판매했다며 항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은행의 프라이빗뱅킹 담당 직원이 평소 친분이 있는 고객의 돈으로 펀드를 이리저리 갈아타다 손실을 낸 사례도 있다. B자산운용 임원은 “지난해 펀드 바람이 불자 실적을 올리는 데 급급해진 은행·증권사 직원들이 펀드의 위험성보다는 높은 수익률을 내세우며 투자자를 유혹한 사례가 많았다”고 말했다.

과거 펀드 불완전 판매 관련 집단소송에서 투자자가 이긴 사례는 러시아펀드가 대표적이다. 1996년 한국투자신탁증권이 판 이 펀드는 러시아 국채에 투자하는 채권형이었다. 주식형이 아니었기 때문에 투자자는 ‘예상 수익 연 15%대’라는 말을 쉽게 믿었다. 하지만 98년 러시아가 국채에 대한 지불유예(모라토리엄)를 선언하는 바람에 원금의 대부분을 날렸다.

법원은 러시아 국채에 투자하면서 위험을 투자자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투자설명서를 나눠 주지 않은 게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투자자에게도 50% 과실이 있다고 판결했다. 과거 펀드나 주식에 투자해 본 경험이 있었던 게 투자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펀드가 실적배당 상품이라는 사실을 투자자도 알고 있었다고 본 것이다.

앞으로 제기될 소송에서도 러시아펀드 판례가 잣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 투자설명서를 주지 않았거나 ‘수익률 몇 % 보장’과 같은 문구가 들어간 광고 전단지가 있으면 투자자에게 유리하다. 반면 판매사나 운용사의 과실을 명백히 입증할 수 없는 경우는 복잡해진다.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공동소송도 추진되고 있지만 펀드 소송은 집단화하기가 까다롭다. 투자자마다 금융상품 지식이나 투자 경험이 다르고 펀드 가입 경로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증권팀=정경민·최현철·김선하·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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