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멀어진 역습의 기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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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6강전>

○·장 리 4단(중국) ●·이세돌 9단(한국)

제5보(54∼65)=기세란 허망한 것일 수 있다(서양 바둑꾼들은 이 단어를 좀체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 승부란 기술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며 불확실성을 향한 정신 투쟁적 성격을 띤다. 기세에서 밀리면 좀체 이길 수 없는 이유다. 오죽하면 이창호 9단 같은 사람이 “승부는 당일의 기세”라고 단언했겠는가. 백△의 후퇴가 ‘기백 없는 수’라는 비난을 한몸에 받은 이유다.

사실 이세돌 9단 쪽도 불안한 구석이 있었다. 우변에서 뻗어나온 흑 대마나 좌변 흑이 순식간에 엷어질 수 있기에 마음놓고 실리를 취하거나 공격에 나서기가 꺼림칙했다. 그러나 흑▲의 요충을 선점하면서 흑의 불안은 자동적으로 해결되기 시작한다. 장리가 54, 56으로 귀를 안정시키는 사이 57로 시원하게 두터움을 확보했고, 멀리 우변 쪽에도 확실한 성원을 보내게 된 것이다.

62도 똑같은 이유로 ‘완착’의 단죄를 받았다. 집이 부족한 채 밀리는 지금 이렇게 한가하게 수비만 해서는 앉아 죽는 일만 남게 된다. 상대가 제아무리 무섭더라도 지금은 ‘참고도’ 백1로 파고 들어 옥쇄를 각오해야 할 시점이었다.

다행히 흑이 2로 물러서 준다면 3이 도톰하다. 흑이 강습으로 나온다면 이곳을 무덤 삼아 최후의 일전을 결하면 된다. 그게 신예다운 승부 호흡이다. 61에 이어 63이 놓이면서 이곳 흑은 얼기설기 탄력을 쌓아가고 역습 기회는 점점 멀어져 간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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