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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 시시각각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리더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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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힘 빠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옆구리를 찔러 G20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것도 사르코지였다. 그는 회의 참가국을 멋대로 바꾸는 월권(越權)도 불사하고 있다. 주요 7개국(G7)도 아니고, 신흥 경제국도 아닌 까닭에 초청장을 받지 못한 스페인에게 사르코지는 프랑스가 가진 초청장 중 하나를 선심 쓰듯 양보했다. G7의 일원인 동시에 유럽연합(EU)의 순번제 의장국인 프랑스는 어차피 이중으로 참가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염치고 체면이고 불구하고 초청장 확보에 혈안이 돼 있던 스페인으로서는 두고두고 감읍할 일이다.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 스페인 총리는 “사르코지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번 금융위기를 유럽, 특히 프랑스의 목소리를 키우는 기회로 활용하겠다는 사르코지의 의지는 확고해 보인다. 국내적으로 지지도 부양 효과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지지도는 이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EU 의장국 지위를 십분 활용해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놀라운’ 리더십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리더십은 지도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리더십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달 말 그는 제1차 국민경제자문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국가 서열이 바뀔 수 있다”며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선진국을 따라가기 힘들지 모르지만 지금이 오히려 기회일 수 있다”고 했다. 외환위기를 극복한 경험을 살려 G20 정상회의의 국제 금융질서 재편 논의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각오도 밝혔다. 이번 위기를 국제 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기회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국제 금융시장은 기관 고장에 악천후가 겹쳐 침몰 위기에 빠진 난파선 신세다. 선장은 힘을 잃었고, 후임 선장은 아직 승선 전이다. 노약자와 청소년을 빼고, 그래도 힘깨나 쓴다는 청장년 20명을 골라 조직한 긴급 구선대(救船隊)가 G20 정상회담이다. 하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20명이 너무 많다는 소리가 벌써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청와대는 G20 정상회의 초청장을 부시의 임기 말 선물이라며 고마워하고 있지만 결코 안심할 상황이 아니다. 사르코지는 G7에 러시아·중국·인도·브라질·멕시코·남아공 등 6개 신흥 경제국을 더해 G13으로 범위를 제한하자는 입장이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 총재는 G13에 사우디아라비아를 추가해 G14로 해야 효율적 논의가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스페인이 추가되긴 했지만, 아시아 금융위기를 계기로 1999년 말 베를린에서 열린 주요국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 참가한 나라들이 이번 G20 정상회의에도 그대로 참가하고 있다. 하지만 계속 이대로 간다는 보장이 없다. 새 선장을 맡게 될 버락 오바마가 어떤 입장일지도 불분명하다. ‘신(新)브레턴우즈’ 체제를 마련하는 작업은 결코 하루아침에 끝날 일이 아니다.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G20의 틀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로선 더 급하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것도 좋지만 G20의 틀부터 정착시키는 데 정부는 외교력을 집중해야 한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