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그들>광주 떠나가는 美문화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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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한바탕 바람이 스쳐지나간 현장이나 조형물엔 상징적 의미가 덧붙여진다.충격적인 사건이 여기에 더해지면 이 상징성은 더욱더 확고해질 수밖에 없다.
훗날 역사가는 나름대로의 재해석 작업을 벌이게 되고 평범한 개인들조차도 역사와 개인사를 오버랩시켜 바라보기 일쑤다.
이 경우 긍정과 부정,선과 악이라는 2분법적 논리는 항상 유효하다고 해도 별로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여기 결코 하나로 환원하기 어려운,두가지의 상징성을 그대로 지닌채 역사속으로 퇴장하는게 하나 있다.
바로 올해를 끝으로 짐을 싸고 문을 걸어닫는 광주 미문화원이그것이다.31일 자정을 D-데이.H-아워로 잡았지만 공식적인 업무는 이미 지난 20일의 리셉션을 끝으로 중단됐다.
두가지 역사적 의미란 무엇일까..아메리칸 드림'과 .화염병'이란 두 단어로 설명해도 무방할 것같다.문화원 폐쇄가 미문화 잔재 청산을 외쳐온 학생들에겐 .당연한 역사의 귀결'로,질곡의역사를 동승한 노년층에겐 .아련한 추억의 소멸' 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그런 맥락일 게다.
광주 미문화원은 단순한 건물 하나라는 겉꺼풀의 의미를 넘어 격동의 현대사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우리 역사 그 자체다.잠시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45년부터 연이어졌던 47년의 해방공간은 .기회의 나라'나 .평화의 사도'로서의 미국의 강렬한 이미지를 심는데 효과적이었다.서울.부산.광주등에 설치된 문화원이 이런 역할을 담당한 선봉장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선진적 새 문물에 목말라있던 당시 학생.지식인들에게 이곳은 문화적 갈증을 해소하는 거의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현재의 양림동 건물로 이전할 때까지 40년간 사용되었던 곳이일제시대 광주 최고의 기생집인 춘목암(春木菴)이었다는 사실도 묘한 흥밋거리였다.
이런 공간에서 많은 청년들이 비치된 신문.잡지.희귀본등을 보며 장래의 밑그림을 그려 나갔다.
문화원측은 또 영화상영 차량을 앞세우고 시골장터를 누비고 다녔는가 하면 미제 라디오를 무상으로 나눠주며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이미 50줄에 접어든 연배라면 땟국물이 주르륵 흐르는 복장으로 장터 스피커 앞에 쭈그리고 앉아 호기심 어린 눈망울을 굴리던 그때의 소년.소녀들을 쉽게 기억해낸다.
그러나 세월이 만들어낸 풍화(風化)는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법..자유와 평화의 전령사'를 자처하던 이곳도 5.18 광주민중항쟁을 겪고난 후 반미운동의 상징물로 그 의미가 뒤바뀌게 된다. 지금까지의 20여차례 방화와 30여차례가 넘는 각종 기습이 변화를 말해주기에 충분하다..아메리칸 드림'은 걷히고 화염만이 건물 곳곳을 휘감았다.88년에는 도서관 탁상시계 뒷면에서사제폭탄이 발견되기도 했다.
90년에 황금동을 떠나 현재의 건물로 이전했지만 고난은 그치지 않았다.잊을만 하면 터지는 각종 시위로 이 지역 상권이 퇴락하자 주변 상인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이곳에서도 문화원은 여전히 .애물단지'였다.이번 문화원 폐쇄가 공식적으로는 미국 공보처의 예산삭감 때문으로 알려졌지만 한편으론 이런 지역 정서도 작용했으리라는 계산이 그래서 가능하다. 어쨌든 올해를 끝으로 격변기마다 의미를 달리해온 광주 미문화원은 역사의 페이지 속으로 잠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곳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장서 5천여권은 호남대로 옮겨 보관되고 인터넷 사이버 공간을 통해 문화원은 살아 있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상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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