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정치는 없고 작전만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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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26일 오전6시,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인 이 시각 여의도 국회의사당에는 신한국당 의원 1백50여명을 태운 4대의 버스가 속속 도착했다.의원들은 재빨리 버스에서 내려 국회 본회의장으로뛰어들었다.누가 볼까 가슴을 졸이면서 기자들이 있나 두리번거렸다.다행히 회의장에는 증인으로.특별초대'된 연합통신 기자만이 있을 뿐 기자단도 야당의원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서청원(徐淸源)총무가 기가 막히게 일을 처리했다”는 칭찬소리도 들렸다.
여당 단독으로 기습처리된 날치기 국회는 이렇게 이뤄졌다.
.버스에 탄 국회의원'은 우리 정치의 후진성을 상징한다.52년 피난지 부산에서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를 강제로 견인해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던 악몽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그러나 그로부터 44년이 지난 이날 국회에는 또다시 버스가 동원 됐다.
이번 기습처리는 야당의원들에게 회의소집 사실조차 알리지 않은채 단독소집,위헌시비를 낳고 있다.군사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우리국회가 겪은 40여차례의 날치기중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다.한쪽이 반대하는 가운데 몸싸움을 벌이거나 장소를 바 꿔 날치기한 적은 있어도 이번처럼 회의사실조차 알리지 않고 기습처리한 적은없었다. 그렇다면 날치기라는 방법을 동원해야할 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는가.23일부터 30일 회기로 열린 임시국회는 아직 26일이라는 시간적 여유가 있다.그안에서 얼마든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처리할 수 있다.국민회의쪽도 1월중 처리를 약속한 터다.
여당은 과연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노동관계법의 경우 한번의 약식 공청회뿐 상임위 심의도 없이 본회의에 직권 상정됐다.이 법은 초안을 만드는데만도 노개위에서7~8개월을 끌어왔다.그만큼 노사의 이해가 첨예하게 얽혀있고 국가경제의 명운(命運)을 좌우할 중대한 법안이기 때문이었다.
납세자요,유권자 입장에서 보면 계속되는 불황으로 고용의 불안정을 느끼지 않는 근로자가 거의 없다.그런 법을 처리하면서 심의가 아닌 통과에 목적을 둔 여당의 태도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럼에도 여당의원들은 26일 기습처리뒤 당직자 회의에서 서로“수고했다”며 자축(自祝)분위기였다.누구를 위한 수고인지 궁금하다.국가 경쟁력 강화와 경제회생을 위한 수고인지,명령권을 가진 1인을 위한 수고인지 명확지 않다.
12월26일 우리 국회엔.정치는 없고 여당의 작전'만 있었다.
이정민 정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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