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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이러고도 '文民시대' 인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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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어제 있은 국회기습변칙처리사건은 지금이 60,70년대인지 90년대 막바지인지,지금 정권이 군사정권인지 문민정부인지 헷갈리게 만든다.철통같은 보안속에 비밀연락을 취해 여당의원들을 호텔에 대기시켰다가 버스에 나눠 태워 어둠속에 국회의 사당에 집결시켰다.그리곤 여당 단독으로,혹 야당의원이 알고 달려올까봐 불안감에 쫓기며 11개 의안을 불과 7분만에 방망이를 땅땅땅 두들겨 통과시켰다.이것이 12.26 기습통과의 줄거리다.
언젠가 많이 들어보던 얘기 아닌가.태평로 의사당주변 호텔에 의원들을 분산 대기시켰다가 어둠속에 국회 제3별관에 집결시켜 공화당 단독으로 3선개헌안을 통과시킨 이른바 9.14변칙사건(69년),국회 제4별관의 외무위회의실에서 여당단독 으로 국가보위법을 처리한 보위법파동(71년)과 어쩌면 수법과 패턴이 그토록 닮을 수 있을까.꼭 우리가 30년전으로 되돌아간 것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우리는 군사정권도 아닌 문민집권세력인 신한국당이 60,70년대도 아닌 21세기 문턱에서 왜 이런 방식을 취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대화와 토론이 아니라 마치 군사작전하듯 국회의원을 병력처럼 동원해 국회를 기습변칙의 장(場)으로 만들 어버렸으니 여기에 무슨.문민'이 있고 의회주의가 있는가.더욱이 노동법과 안기부법은 여당의 정파적(政派的)이익과 관련된 법도 아니다.국가경쟁력과 안보강화를 위한 법이다.우리 역시 안기부법개정의 필요성엔 공감했고,노동법에 대해서도 일부 우려는 하면서도 세계차원의 새로운 경제질서에 대응한 노사개혁원칙은 인정했던 터였다.
이런 중대한 법률들을 야당에 대한 끈질긴 설득노력도 해보지 않은채 일방적으로 기습통과시켰으니 그 법들의 안정적.효율적 시행문제는 고려하지도 않았다는 말이 아닌가.
특히 야당도 노동법에 대해선 극한투쟁을 하지 않고 내년 1월중 여야타협으로 통과시키겠다고 공언하고 있었는데 왜 굳이 이런무리한 짓을 해야 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기습통과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노조단체들이 파업과 강경투쟁을 들고 나오는 것만 봐도 집권측의 단견(短見)을 나무라지 않을 수 없다.그렇잖아도법안내용에 불신을 보여온 노조단체들이 최악의 기습통과에 자극받아 반발의 강도(强度)를 높일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인데 집권측이 과연 대책이나 준비하고 이 런 일을 했는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이런 사태가 집권측의 리더십에 큰 책임이 있다고 본다.노동법.안기부법의 국회통과를 야당과의 승부라고만 보고,야당이 반대하고 원천봉쇄하니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야당에 이겨야겠다는 심리에서 이런 일이 자행됐다고 본다.스스 로 야당시절 날치기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말해온 집권측이다.바로 그 사람들이 야당과의 협상과정을 통해 근로자와 국민을 납득시키는 민주적 접근을 무시한채 오직 야당의 기를 꺾고 야당에 이겨야겠다는 사고방식에서 스스로 변칙을 감행한 것 이다.
그런 과정에서 이른바 대선(大選)예비주자라는 인사들까지 기습.부대'(部隊)의 일원이 된 것도 개탄스럽다.국민한테 비난받을이런 일에 대해선 내부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방침을 바꿔 볼 노력을 보여야 당연함에도 이들은 묵묵히 변칙처리 에 참여했다.
그러고도 지도자의 덕목(德目)과 지도력을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번 사태에 있어 야당도 잘했다고 보지 않는다.국회의원천봉쇄란 낡은 투쟁방식으로 날치기의 빌미를 제공한 책임에서 야당은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앞날이 더 걱정스럽다.그렇잖아도 내년 대선이 다가옴에따라 정쟁(政爭)의 격화가 예상됐는데 이번 사태로 정국은 더욱극한대립으로 갈 수밖에 없게 됐다.이런 불안한 정치상황이 노사불안-사회불안-민심불안으로 이어질 것도 뻔한 일이다.힘을 모아국운(國運)을 개척해 나가도 힘이 모자랄 판에 벌써 이곳저곳에서 파업소리가 들리고 정치.경제.사회불안이 가중돼 나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이런 상황을 몰고 온 이 나라의 지도력빈곤을 새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오직 사회 각분야가 정치바람을 덜 타면서 의연히 각자의 맡은바에 최선을 다하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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