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겨울을 더 춥게 하는 發想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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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올겨울은 오랜만의 본격적인 추위로 유난히 춥게만 느껴진다.내려간 수은주 외에도 올겨울을 유독 춥게 느끼게 하는 것들이 있다. 무한경쟁이라는 이름아래 기업들이 추진하고 있는 명예퇴직.
조기퇴직등 감원 움직임으로부터 월급쟁이들을.파리목숨'으로 만들노동법.개악'움직임,그것도 참여와 협조의 새로운 노사관계를 만든다고 해놓고 노사 당사자.시민단체.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개정을 일방적으로 강행하려는 정부.여당의 움직임이 그것이다.
또 대선을 앞두고 우리사회의 국가운영 비전과는 상관없이 그저 이기고 보자는 정략 아래 이전투구하고 있는 정치권의 모습이 그러하다. 그러나 정작 온몸을 얼어붙게 하는 것은 한국정치와 경제의 최고 실력자 두 사람의 최근 발언 내용이다.우선 충격적인것은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발언이다.金대통령은“북한 무장공비침투사건은 대통령으로서 해당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해야 할 상황까지 조성했다”고 말함으로써 계엄령 선포를 검토했음을 시사한 것으로 언론은 전하고 있다.
물론 무장공비는 빠른 시간내에 소탕해야 했다.또 정책결정이란그 과정에서 극단적인 조치들까지도 검토하는 경우가 있다.그러나국내외적 파장을 감안할 때 계엄령이 공비소탕에 효과적인 수단인가를 따져볼 필요도 없이 한국정치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왔는가를조금이라도 생각해 본다면 이의 선포를 검토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온다.아니.계엄령'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조건반사적으로 어두웠던 그 암흑과 폭력의 시대가 떠오르며 털끝이오싹해진다.
더 큰 충격은 대기업들의 모임인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인 최종현(崔鍾賢)선경그룹회장이 金대통령에게 긴급명령이라도 내려 모든임금을 5년간 동결하도록 건의한 바 있다는 보도다.
물론 崔회장의 주장대로 우리 경제는 위기며,기업이 망하면 노동자들의 복지도 없다.그러나 기업이 망하고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쫓겨도 기업주는 망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나아가 과연 현재의 경제위기가 단순히.고임금 탓'만이냐는 것이다.
이와 달리 최근 정부의 공정거래위원장과 미국의 한 시사주간지는 경제위기의 근본적 원인중 하나로 경제구조의 비효율성을 주목한 바 있다.즉 재벌중심의 경제구조를 개편,업종전문화를 통해 개별기업의 경쟁력이 중심이 되는 경제구조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따라서 문제의 근원은 내버려두고 임금동결만을 주장하는 것은말이 되지 않는다.
정작 문제는 입만 열면 기업에 대한 정부의 규제완화를 주장하면서 노동자들에 대해선 정부의 규제강화를 촉구하는 발상이다.한마디로.나는 풀어주고 남은 묶으라'는 심보다.재계대표라는 사람이 다른 것도 아니고 대통령의 긴급령,즉 긴급조치 를 요구하는발상이다.
이 두 최고 지도자의 발언을 그저 스쳐가는 1회성 에피소드로지나칠 수 없는 이유는 계엄령과 긴급조치를 대수롭지 않게 검토하고 제의하는 이들의 의식구조와 사고방식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한낱 기우(杞憂)인줄 알면서도 북한 붕괴와같은 남북관계의 비상한 변화가 생겨 내년 대선이 없을 수도 있다는 한 여권 관계자의 발언과 야당의 문제 제기에 신경이 쓰이게 된다.
특히 일부 과잉충성분자들이 대통령의 의지와 상관없이,또 북한붕괴의 객관적 가능성과 무관하게.국가비상사태'에 의해 대통령선거를 하지 않고 현대통령이 일정기간 권력을 계속 행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희망사항'에서 북한관련 정보를 그러한 방향으로 왜곡 해석하고 대북(對北)정책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를 낳게 한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북한과 전쟁중이었고 현재에 비해 사회 전체가 엄청나게 낙후했던 50년대초에도 대통령선거는정상적으로 치러졌다는 사실이다.따라서 무슨 일이 있어도 대선은치러져야 한다.창문을 열고 겨울 찬바람에 정신 을 차린 뒤 모두 한번쯤 진지하게 반문(反問)해 보아야 한다.정말 우리사회에서.계엄령과 긴급조치의 시대'는 끝난 것인가.
본란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孫浩哲 〈서강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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