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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을찾아서>14.조주 柏林禪寺 上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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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묻는다: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간다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萬法歸一 一歸何所〈處〉)

답한다:내가 청주에 있을 때 베적삼을

한 벌 해 입었는데 무게가 7근 나갔다.

(我在靑州 作一領布杉 重七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萬法歸一)

‘만법귀일’이라는 화두는 선장(禪匠) 조주종심선사(778~897)와 한 중의 문답에서 나왔다. ‘만물의 뿌리는 하나(萬物一體)’라는 동아시아인들의 천명관(天命觀)을 잘 드러낸 화두다. 또 자연속에 침잠해 자신을 비워내며 자연과 하나가 되는 동양 사유방식의 정점인 선을 설명하는 철학적 웅변이기도 하다.

한편 이 화두는 근대 한국불교 중흥조인 경허선사가 19세때 들었던 공안(公案)이기도 하다.

질문은 존재의 근원이 무엇이냐는 매우 철학적이고 심오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만법’은 긍정·차별·유·현상·제법실상·방행(放行)의 절대현실을, ‘하나’는 부정·평등·무·본체·제법무아·파주(把住)의 일체공(一切空)을 뜻한다. 방행과 파주는 각각 긍정과 차별, 부정과 평등을 의미하는 선학용어다.

한자의 ‘일(一)’은 하늘과 땅이 합쳐지는 지평선 모양으로 무한과 영원을 상징한다. 노자는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으며… 셋은 만물을 낳는다”고 했다. 노자 당시에는 0이라는 숫자개념이 없어 1을 무·진리·우주만물의 근원으로 보고 모든 존재(有)가 여기서부터 비롯된다고 보았다. 만법의 귀의처인 ‘하나’란 곳은 일체의 상대적 차별성이 사라진 곳, 오직 신성한 밝은 빛만이 내리쬐는 절대평등의 지평선이다.

물음의 답은 간단하다. 하나가 다시 돌아가는 곳은 ‘만법’이다. 다시말해 만법의 근원은 만법이다. 이같은 순환론은 하나가 많은 것이고, 많은 것이 하나(一卽多多卽一)라는 ‘하나=만법’의 등식을 성립시킨다. 이것이 바로 불교 화엄철학이 밝힌 법계연기의 제법실상(諸法實相)이다.

그러나 조주의 답은 이런 논리적 설명을 거부한채 전혀 엉뚱하다. 선은 논리란 인간이 공리적 활동을 위해 만들어낸 잔꾀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답의 포인트는 ‘적삼’과 ‘7근’이다. 베적삼은 누구의 것이든 그 옷감(재질)·외형에선 똑같다. 그렇지만 체구를 따라 재단하면 옷감이 5근, 6근, 7근등으로 각각 달라진다. 여기서 ‘7’은 본체와 구분된 현상, 하나에 비해 많은 것, 평등에 대한 차별을 나타낸다.

선학에서는 이를 무분별(적삼)의 분별(7근), 평등속의 차별, 차별속의 평등이라고 한다. 그 궁극적인 지향점은 생사일여, 즉 모든 차별과 대립의 소멸이다. 차별과 평등이 대립하지 않고 함께 할 수 있는 공간, 이것이 옷으로 보면‘평등’, 무게로 보면 ‘차별’인 베적삼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속현실을 부정만 하는 허무주의·은둔주의에 빠지지 않고 그 한가운데서 만유의 현상을 능히 포용하면서 세속과 함께하는 ‘극락의 살림’을 꾸릴 수 있게 된다. 조주는 빈부·귀천과 같은 모든 상대적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평등속의 차별을 이론적 개념이 아닌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사물, 곧 삼베옷 한 벌로 명쾌하게 설파한 것이다.

잠시 선가에서 즐겨쓰는 ‘7’이라는 숫자를 살펴보자. 우선 이런 고사가 있다. 불법 포교차 떠나는 제자가 부처한테 물었다. “만일 누군가가 못되게 굴면 그를 몇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부처가 대답했다. “일곱번 용서해라.”

또 석가모니 이전 일곱 부처가 역설해온 ‘7불통게’(일명 제불통게)라는게 있다. 이 게송(偈頌)의 내용은 “나쁜 짓 하지 말고(諸惡莫作), 선행을 행하며(衆善奉行),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自淨其意), 이것이 모든 부처의 가르침이니라(是諸佛敎)”고 설파하고 있다.

이런 선문답도 있다. 방온거사가 도반인 남악 형산의 단하선사를 방문했다. 두사람은 아무말 없이 한동안 침묵한채 얼굴만 서로 쳐다봤다. 이윽고 방거사가 땅바닥에 지팡이로 일곱 칠(七)자를 썼다.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단하가 그‘칠(七)’자 아래에다 ‘일(一)’자를 그어 답했다. 방거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하나(一)를 봄에 일곱(七)을 잊는도다.”

여기서의 7도 긍정·차별을 상징한 숫자다. 단하의‘1’은 부정·평등을 가리킨다. 따라서 단하의 ‘1’이라는 부정은 ‘7’이라는 긍정에 앞서는 절대부정을 통해 얻은‘긍정’이며 존재의 근원이다.

지금도 호남성 형산에 가면 옛날 단하사(丹霞寺)가 있고 불당 출입문 위에 단하와 방거사의 문답을 기념한 ‘칠일유지(七一遺址)’라는 오석 편액이 박혀있다. 조주의 할아버지뻘인 석두희천선사도 상당법어에서 “마음과 부처·중생, 보리와 번뇌는 그 이름만 각각 다를 뿐 본체는 하나다”라고 설파한 바 있다.

가정주부가 보자기를 들고 시장엘 나간다. 콩나물·두부·파·가지등을 사니 각각 비닐봉지에 넣어준다. 주부는 이 각각의 봉지들을 보자기에 묶어 싸가지고 집으로 돌아간다. 주부의 시장보따리는 겉으로만 보면 하나다. 그러나 풀어헤치면 콩나물·두부봉지등 여러개다. 이것이 바로 만법이 하나고, 하나가 만법인 도리다.

삼라만상의 존재현상도 이와 같다. 모든 것을 ‘평등’이라는 큰 보자기로 싸버리면 높은 사람·낮은 사람도 없고, 부자도 가난뱅이도 없다.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귀천·상하등 무수한 상대적 차별이 마치 주부의 장보따리속 콩나물·두부봉지처럼 우글거리고 있다.

선은 이같은 만물일체사상의 구체적 실천방법으로 물아(物我) 통일적 순수경험을 제시한다. 바로 꽃을 볼때는 꽃이 되고, 물고기를 볼때는 물고기가 되는 자기와 대상의 ‘혼연일체’다. 이것이 자신을 비워 대상과 하나가 되는 물아의 통일이다. 선은 개념과 논리를 거부하고 대상 자체로 바로 들어가 그 내부에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보고자 한다. 이것이 곧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는 것이다.

꽃을 안다는 것은 스스로가 꽃이 되어 꽃처럼 비를 맞고 햇빛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꽃이 나에게 대화를 하고 나는 그 꽃의 모든 신비와 기쁨·괴로움을 알게 된다.

이같은 물아통일은 T S 엘리엇의 시세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음악은 너무 깊이 들려

(Music heard so deeply)

전혀 들리지 않네,

그러나 당신이 음악인 것을

(That it is not heard at all,

but you are the music)

음악이 지속되는 한.

(While the music lasts)

그의 유명한 시 “4중주”의 일부다. 윌리엄 존 스톤 신부(예수회·아일랜드출신·일본 상지대 동양종교연구소장)는 이 시의 ‘당신=음악’인 곳은 신이 전혀 들어설 수 없는 일원론의 세계며, 선적 통찰의 정수라고 평했다. 이것이 돈오 남종선이 추구하는 심(心)과 물(物)의 통일이다. 이 시에서 최고로 고양된 순간은 바로 자기가 모든 것(음악)과 합일된 상태를 느끼는 때다. 그 순간에는 모든 우주가 자기 속으로 들어와 존재하게 된다.

이 모든 존재와의 합일은 각기 다른 사물의 특수성(차별)을 배제하지 않는다. 마치 “장자”의 ‘제물론’ 마지막에서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어 “장주가 나비냐, 나비가 장주냐”며 혼연일체가 됐다가 꿈을 깨니 장주와 나비가 분명히 구별된 것과 같다.

실제로 엘리엇은 도쿄(東京)대 마사오 히라이 교수가 런던으로 찾아갔을 때 계속 질문을 퍼부었을 정도로 ‘선’에 대해 관심이 컸고 동양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오늘날 선에 대한 관심은 얄팍한 통속성(通俗性)과 결부돼 기껏 건강관리법·회사연수의 흥미과목등으로나 활용되면서 그 본질과 거리가 먼 외도를 하고 있다.

개념적 논리는 인간의 삶에 진정한 힘을 부여해주지 못한다. 그것은 감정적 순간에서는 쉽게 잊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선이 지향하는 실존적이고 체험적인 물아통일(物我統一)에서 얻는 지혜는 어떠한 위기에도 우뚝한 기둥으로 버틴다.

‘만물은 한 근원’이라는 관점에 서면 생사의 대립이 있을 수 없다. 인간 숙명 가운데 가장 치열한 난관인 생사문제도 이렇게 한마디로 끝내는게 선이다.

증명:月下 조계종종정 ·圓潭 수덕사방장

글:이은윤 종교전문기자 사진:장충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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