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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문화기행>빈-미술사 박물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1면

빈.미술사 박물관'의 10번 전시실,16세기 플랑드르 풍속화의거장 피터 브뢰겔(1525/30~1569)의 걸작들이 모여 있는 방에 들어선 나는 잠시 몽롱한 상념에 빠져들었다.16세기 앤트워프와 브뤼셀에서 활동했던 화가의 손에서 떠나 소유주가 바뀔 때마다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수많은 저택의 벽들을 장식했을캔버스들,그 말없는 목격자들은 주인의 흥망성쇠를 기억하고 있을까.예술과 삶의 유전(流轉)이 덧없기만 하다.
.시골결혼식'(1568년.유화.114×163㎝)에서 무대는 허름한 헛간이다.둥글넓적한 몸매에 아둔해보이는 농민들이 길다란나무 탁자에 둘러앉아 게걸스레 음식을 먹고 있다.시끌벅적한 사람들 속에 묻혀 신랑과 신부는 눈에 띄지도 않는다 .그림을 한참 들여다본 끝에 나는 겨우 신부 비슷한 여자인물을 찾아냈다.
머리에 작은 화관을 쓰고 두 손을 앞에 모은 채 흐뭇한 표정으로 정면을 향해 앉은 처녀다.그녀의 등뒤에 걸린 초록색 휘장이일종의 후광 역할을 해 오늘의 주인공 임을 암시할 뿐 웨딩드레스 비슷한 것도 걸치지 않았다.화면 속의 인물들 가운데 가장 정적인 자세로 마치 부조처럼 제자리에 붙박여 있는,수줍음으로 뻣뻣이 굳은 불쌍한 신부를 놔두고 신랑은 대체 어디서 무얼 하는 걸까.신랑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단서는 거의 없다.신부로부터 왼쪽으로 세번째 자리에 앉아 양손에 수저와 접시를 들고 정신없이 수프를 퍼먹고 있는 남자인가.아니면 화면 중앙에 앉아검은옷을 입고 잔을 든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사람이 신랑인가. 그는 벌써 거나하게 취한듯 뒤로 자빠질 듯한 자세로 의자에겨우 엉덩이를 걸치고 있다.결혼식은 어른들을 위한 잔치만은 아니다.어른들의 흥겨운 소란에 아랑곳없이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접시에 남은 찌꺼기를 손으로 하아먹는 아이의 모습 이 웃음을 자아내는 동시에 눈물나도록 정겨웠다.어린아이의 고독한 식탐은 궁핍했던 우리의 60년대와 어쩌면 그리 닮아있던지….
단순 투박한 선과 원통형 볼륨이 농민들의 순박함을 효과적으로전달해 주는 작품이다.여기에서 가장 비중있게 묘사된 인물은 음식접시를 나르는 두 남자다.전경에 불쑥 튀어나온 두 인물의 과장된 크기와 붉고 푸른 빛깔의 윗도리에서 두드러 지는 선명한 색채대비는 군중 속에 파묻혀 보일락 말락한 신랑.신부를 젖히고이들을 잔치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있다.관심이 온통 먹는 데만 쏠린 손님들과 악사의 눈엔 음식을 갖다주는 사람들이 크게 보이는게 당연한 이치다..먹는게 남는다 '는 촌사람들의 의식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코믹한 장면이다.
생존을 위해 고된 노동에 종사해야 하는 농민들에게는 인생의 대사인 결혼식조차 일상과 크게 다를 바 없는,모처럼 한데 모여실컷 먹고 마시며 그동안 쌓인 피로를 푸는 날이리라.
무르익은 시골잔치의 어느 한 순간을 포착해 인간이 보일 수 있는 모든 반응을 빈틈없이 캔버스로 옮긴 브뤼겔.그는 아주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는 위대한.눈'을 갖고 있었다.결혼식 현장을 찍은 현대의 어떤 스냅사진도 그보다 더 정확하 고 날카롭게현실을 재현하진 못하리라.
최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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