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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 대행 63일] 下. 法治 중요성 확인…권력 분산 기대감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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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 고건 국무총리가 지난 15일 오후 제주에서 열린 아시아개발은행 연차총회에 참석한 뒤 서울로 오는 항공기 안에서 업무 서류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

"처음엔 걱정이 많이 됐다. 그러나 국민이 성숙했다."

고건 총리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고 꼭 39일이 지난 뒤인 지난달 20일 처음으로 기자들을 만나 속내를 털어놨다. 그는 "다행히 국정혼란이나 경제불안 없이 안정이 유지되고 있다"며 그 공(功)을 국민에게 돌렸다.

헌법재판소가 盧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심판 청구를 기각한 지난 14일 오전.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은 많은 국민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공부를 제대로 했다. 윤영철 소장에게서 명강의를 들은 것이다.

정부의 위기관리 시스템이 차분하게 돌아간 것도 대행체제가 얻은 큰 소득이다.

반면 사회갈등이 커지고 일부 국정공백도 있었다. 정상외교도 올스톱됐다. 일부 경제정책의 혼선도 대행체제와 무관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소추로 경험했던 63일간의 '대통령 대행체제'. 예기치 않았던 정치 대(大) 실험이 끝났다. 대차대조표를 살펴보면 이처럼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적지 않다.

다만 전체적으론 후한 점수를 줄 만하다. 큰 동요나 혼란없이 위기를 넘김으로써 우리 시민사회가 한층 성숙했다. 경제도 정치적 충격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기초여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성숙해진 시민사회=탄핵 가결 이후 한동안 찬반 촛불집회가 잇따랐지만 우려했던 큰 혼란은 없었다. 시민사회의 총체적인 역량이 성숙했음을 입증한 것이라는 게 많은 전문가의 분석이다.

정진곤 한양대 교수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의외로 큰 동요없이 국정이 운영되고 사회가 안정을 유지한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하고 저력이 있음을 확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도 그런대로 잘 굴러갔다.

윤근영 연세대 교수는 "최근 해외 악재로 어려움을 겪고는 있지만 주식시장 등 국내 경제가 탄핵사태로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고 본다"고 말했다.

현대경제연구원 유병규 경제본부장은 "우리 경제가 단기적인 정치적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기초 여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이는 국민에게 시장에 대한 신뢰감을 심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권력분산 가능성 시사=국정안정은 정부 시스템이 잘 작동됐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많다. 특정인이 아니라 정부가 제 기능을 다했다는 의미다.

한덕수 국무조정실장은 "과거 같으면 매일 대통령에 대한 보고와 지시를 통해서만 움직이던 정부가 참여정부 이후 큰 틀의 범위 안에서 자율적 판단과 정책의 집행을 하게 됐고, 이런 시스템이 이번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했다"고 말했다.

장훈 중앙대 교수도 "대통령이 두달 동안 없었지만 큰 문제가 없었다는 점에서 전반적으로 정부 운영 시스템이 안정성을 확보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대행체제의 경험은 '권한집중과 전횡'이라고 하는 과거의 제왕적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인식에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이는 권력 분산에 대한 국민의 불안감 해소로 이어진다. 심지어 내각책임제나 이원집정제 등을 검토할 만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달곤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실질적인 책임총리제 등 최고 국정책임자의 백업(back-up) 시스템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의영 경희대 교수는 "국정운영 시스템을 보다 제도화하기 위해 이원집정제 등 권력구조 개편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정 차질="대통령에게 수시로 보고해 온 사안이다. 대통령의 최종 판단없이는 확정하기 곤란하다. 한 두달 늦춰질 수밖에 없다."

지난달 28일 김병일 기획예산처장관이 高총리에 대한 업무보고에 앞서 기자들을 만나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내년부터 바뀌는 예산 편성 방식에 따라 4월 말까지로 예정된 5년 중기 국가재정 운영계획 수립의 차질을 설명하면서다.

정부혁신.지방분권위 등이 추진하고 있는 12개 국정과제도 대통령이 독려와 결정을 못함으로써 당초의 속도를 내지 못하는 등 추진에 한계가 있었다. 盧대통령이 일주일에 한번씩 회의를 열어 챙겨온 사안이다.

외교 분야의 공백도 컸다. 盧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을 위한 한.러 협의가 보류됐고, 4월로 예정됐던 네덜란드 총리의 방한도 연기됐다. 지난달 15일 방한한 딕 체니 미국 부통령은 盧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국정의 공백을 얼마나 빨리 메우느냐는 이제 盧대통령의 몫이다.

탄핵 찬반으로 양분된 국민적 갈등의 후유증을 말끔히 씻어내려는 노력도 시급하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는 "이번 탄핵사태를 계기로 국민 전체를 보듬을 수 있는 사회 통합과 안정 노력이 더 절실해졌다"고 말했다. 이전보다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움말 주신 분들=김도훈 산업경제연구원 거시경제팀장, 김선빈 삼성경제연구원 수석연구원, 김용복 경남대(정치학).김의영 경희대(정치학).송기춘 전북대(법학).신광영 중앙대(사회학)교수, 심지연 한국정치학회장, 오석태 씨티그룹 이코노미스트,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본부장, 윤근영 연세대(경제학).이달곤 서울대(행정학).장훈 중앙대(정치학).전주성 이화여대(경제학).정용덕 서울대(행정학).정진곤 한양대(교육학)교수, 정태욱 현대증권 리서치센터 본부장, 조동근 명지대(경제학) 교수 <이상 가나다 순>

◇특별취재팀=이철희.최훈(정치부), 김남중(정책기획부), 홍병기(경제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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