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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영화제] '올드보이' 입소문…시사회 만원사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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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회, 환갑을 3년 앞둔 올해의 칸 영화제는 회춘을 화두로 정한 것처럼 보인다. 중후한 오랜 단골들을 예우하는 대신 각각 다섯 편 안팎의 영화를 만든 비교적 젊은 감독들로 19편의 경쟁작(당초 18편에서 비경쟁부문이던 미국 조나단 노시터 감독의 다큐'포도주 세상'이 추가됐다)중 절반쯤을 채웠다.

'올드'한 칸을 이처럼 영화적'소년'으로 되돌리려는 시도에는 아시아 영화가 큰 몫을 한다. 올해의 아시아 영화는 종전처럼 각국의 대표선수급 거장이 아니라 비교적 젊은 30,40대 감독들의 다양한 작품들이 초청돼 영화제에 활력을 더하고 있다.

경쟁에 오른 두 편의 한국 영화 '올드 보이''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도 이런 흐름의 대표적인 예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가 먼저 15일 밤(현지시간)공식 상영됐다. 주인공 오대수가 장도리 하나로 20명을 해치우고 나오는 장면에서 한 차례 박수가 터졌고, 영화가 끝나자 5분여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전날 1000석 규모의 드뷔시 극장에서 열린 기자 대상 시사회도 입석까지 빼곡히 들어찼고,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일이 별로 없이 대부분 끝까지 남았다.

개막일부터 심사위원장인 퀜틴 타란티노 감독의 언급을 비롯해 입소문이 대단했던 덕분이다. 타란티노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찬욱 감독을"가장 흥미로운(the most exciting) 액션 감독 중 하나"라고 밝혔다.

사실 올해 칸의 변화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타란티노다. 현지의 각종 영화제 소식지는 최신작'킬 빌'을 통해 동양 액션물과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애호를 아낌없이 드러낸 그와 오시이 마모루의 애니메이션'이노센스'나 '올드 보이'의 경쟁부문 초청을 자연스레 연관짓고 있다.

박찬욱 감독도 공식 기자회견에서 타란티노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의 영화는 한국의 젊은 영화감독 지망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킬 빌'은 불행히도'올드보이'과 같은 시기에 개봉하는 바람에 한국에서 흥행에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해 좌중을 웃겼다. 그는 "'킬 빌'이나 '올드 보이'뿐 아니라 고대 그리스비극에서 최신 할리우드 오락영화까지 복수는 즐겨 다뤄져 온 소재"라면서 "사적인 복수가 금지된 현대사회에서 금기를 시도하는 것은 예술가의 특권"이라고 그 매력을 설명했다.

흥미롭게도 또다른 경쟁작인 이탈리아 영화 '사랑의 결과'역시 감금과 복수라는 설정이 '올드 보이'와 유사한 작품이다. 남자 주인공은 가족을 버리고 호텔에서 생활하며 이웃 투숙객의 사생활이나 훔쳐보는 퇴락한 중년처럼 보이는데, 실은 마피아 조직에 큰 약점을 잡혀 8년간이나 갇힌 채 돈세탁을 담당하는 인물임이 드러난다.

'사랑의 결과'와 달리'올드보이'는 폭력이 지나치다는 비판도 적잖이 들었다. 몇몇 장면에서 관객들이 눈을 가리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박감독은 기자회견에서 "폭력을 그저 재미나 볼거리로 사용하는 데는 거부감이 있다"면서 "폭력을 가하는 자와 당하는 자가 어떤 변화를 겪는 지 표현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극중 동년배인 최민식과 유지태의 실제 나이 차이가 너무 크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이런 답을 했다. "이우진(유지태)에게는 누나의 죽음 이후 성장이 멈춰 버린, 올드한 보이의 이미지가 있어서 젊어보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나이와 서열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이렇게 젊어보이는 사람이 나이들어 보이는 사람을 갖고 노는 것이 한국관객에게 흥미로웠을 것이다."

경쟁작 상영의 첫 테이프를 끊은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는 16일 현재까지 가장 고른 호평을 받고 있다.

'아무도 모른다'는 젊은 엄마가 돈벌러 나간다는 쪽지를 남기고 사라진 뒤 오손도손 어렵사리 살아가는 4남매의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모습이 흡사 일본판 '저 하늘에도 슬픔이'같다.

칸=이후남 기자

*** 두차례 황금 종려상 에밀 쿠스트리차, 세번째 상 탈까

한편으로는 '물갈이'를 내세우면서도 칸은 몇몇 단골에 대해서는 지고지순한 애정을 과시했다. 대표적 인물이 이미 두 차례나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세르비아 출신 감독 에밀 쿠스트리차다.

경쟁부문에 초청된 신작 '인생은 기적(Life is Miracle)'은 유고내전이 발발하던 1990년대 초로 시간을 되돌린다. 주인공은 시골마을의 철도를 새로 단장할 꿈에 부푼 보스니아인 기술자다. 정서가 불안정한 오페라 가수 출신 아내와의 애정은 그저그렇지만, 프로진출을 꿈꾸는 축구선수 아들에 대한 두 부부의 사랑은 단단하다. 이런 와중에 전쟁이 터지고, 징집된 아들이 적군 세르비아의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이 들린다. 주인공은 아들과 교환하기 위해 포로로 데려온 보스니아 간호사와 예기치 못한 사랑에 빠진다.

감독은 "이 영화는 유고내전이라는, 특정한 정치적 사태 때문에 만든 영화가 아니다"라면서 "르완다나 (남북 관계를 지칭하는 듯) 한국처럼 서로 말이 통하는 상대 사이에도 적의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생겨날 수 있는 얘기"라고 말했다.

95년작 '언더그라운드'의 친(親) 세르비아 시선 때문에 비판받은 것을 비롯, 갖은 논쟁으로 산전수전을 겪은 감독은 기자회견을 주도하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현재 이라크 상황과 관련해 부시 행정부에 대한 시각이 없는 데 아쉬움을 드러낸 미국기자에게는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다"고 응수하는가 하면 번번이 인터뷰를 거절당했다고 푸념하는 유고연방 출신 기자에게는 "나는 유고가 싫다"고 면박부터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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