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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포커스>불행한 희생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3개월간 북한에 잡혀 있다가 최근 풀려나온 미국 청년은 개인적으로 매우 불우(不遇)한 인간이면서 공교롭게도 한국적 비극을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지난 8월 중국땅으로부터 압록강을 헤엄쳐 북한땅에 들어가 스파이혐의를 받고 체포됐다 가 지난달말 풀려난 이 젊은이는 제나라엔 귀환했지만 제가 살던 집으론 돌아갈 수 없는 형편이다.그의 종전 주거지엔 세건의 구속영장이 계류(繫留)중이기 때문이다.
자동차 난폭운전으로 이미 수감된바 있을 뿐만 아니라,어머니 소유재산인 기물을 파괴하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부인을 강제로 끌어내려는 과정에서 간호원을 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등 혼돈의 생활을 해온 사람이라는게 경찰기록이다.그러나 우리의 가슴을더욱 안타깝게 하는 것은 이 젊은이가 우리와는 전혀 무관한 외국인이 아니란 점이다.
에번 헌지커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 26세의 이 청년은 현재는이혼한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다.
아버지는 한국전 참전병사였다는 것이다.남북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전쟁산물이 세월과 자리가 바뀌었는데도 불구 하고 불우한 처지를 계속 헤매고 있는 안타까운 인생인 셈이다.그에게서 우리는 반세기전에 겪었던 민족비극의 유산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불우한 젊은이가 북한땅에 들어간 과정은 어이가 없다.보도된 바에 따르면 그는 술에 만취된채 발가벗은 몸으로 압록강을 도강(渡江)했다.동기는 공산주의 북한땅에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비정상적 정신상태에서 그는 입북(入北)한 것이다.
이처럼 불쌍한 인생을 놓고 벌어진 주변의 소란은 씁쓸하기 짝이 없다.북한 당국은 그의 석방을 놓고 10만달러를 요구했다가5천달러를 받고 풀어주었다.10만달러를 제시했던 것은 벌금이었고,석방하면서 받은 5천달러는 그의 숙박경비라는 것이다.결국 그 돈은 남편도 없이 혼자 살아가는 불행한 어머니가 자식의 생환(生還)을 위해 허겁지겁 만들어 지불했다는 것이다.
미국 언론들은 북한이 석방대가로 현금을 요구한 것을 두고 북한의 절박한 외환사정으로 풀이했고,이 시기에 그를 석방한 타이밍에 대해서는 잠수함침투사건 이후 동결된 미.북한 관계개선을 의도하는 일종의 제스처로 풀이하기도 한다.심지어 잠수함침투사건에 대한 나름대로의 사과며,대미(對美) 관계개선조치가 아니냐는해석까지 나오고 있는 판이다.
이같은 풀이가 반드시 옳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단계다.이것은 북한이 억울하게 뒤집어 쓴 오해일지도 모른다.그러나 그 진위(眞僞)를 따지기에 앞서 북한이 이같은 논의대상의 행동을 벌인데대해 씁쓸한 생각을 씻어 버리기는 쉽지 않다.
씁쓸한 심정은 북한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미국 최대 명절의하나인 추수감사절 직전 평양에 들어가 애처로운 조난자를 구조해데리고 나온 하원의원 빌 리처드슨의 화려한 모습을 바라보는 심경도 비슷하다.위기에 처한 자국민을 구출해낸 실적에 대해 이의(異議)를 달려는 생각은 없으면서도 남북한 문제로부터 챙긴 자신의 정치적 노획을 앞에 놓고 의기양양해 하는 미국 한 의원의모습에 씁쓸한 심정을 금하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과거에도 저개발국들의 국내문제를 전공분야로 삼아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쌓아온 미국 의원들이 여럿 있었다.해당국가의 인권개선과 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이들의 기여는 부인할 수 없지만 이런 문제들을 자신의 성장에 활용하려는 정치적 행태 에 대해선 입맛이 쓴 인물들이 한국문제와 관련해서도 몇사람 있었던게 사실이다.이제는 북한이 그 무대를 제공하려는 것인가.
(미주총국장) 韓南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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