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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는 이제 초반일 뿐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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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공이 투수의 손끝을 떠나는 순간 관중석에선 탄식이 새나왔다. “아이고-.” 그런데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장쾌한 만루 홈런이 터졌다. 천덕꾸러기 타자는 순식간에 팀의 영웅이 됐다. 그 덕에 땅에 떨어졌던 감독 주가도 덩달아 올랐다.

지난달 30일 전해진 한·미 통화 스와프 체결 소식은 야구만큼 드라마틱했다. 금융시장의 반응이 그랬다. 주가는 사상 최대폭으로 뛰었고, 원-달러 환율은 11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 미국 월가에서도 “한국의 부도 가능성이 사실상 제로가 됐다”는 축전이 날아왔다. 가히 베이징 올림픽 야구 준결승전에서 일본을 격침시킨 국민타자 이승엽의 홈런에 비길 만했다.

그러나 축포를 쏘아 올리기엔 아직 이르다. 홈런이 9회 말에 터진 거라면 좋으련만 경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 남은 이닝이 훨씬 더 많다. 게다가 상대팀의 다음 타선은 부실 건설회사와 저축은행이라는 무시무시한 타자로 이어진다. 벌써 일을 내고야 말 기세다.

어쩌면 중반 이후엔 우리가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난관과 맞닥뜨릴 수도 있다. 한국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다. 2007년 기준 수출입 규모가 국민소득의 94.2%에 달했다. 수출이 살아나야 경제에도 생기가 돈다.

그동안엔 위기가 닥칠 때마다 새 시장이 열렸다. 6·25 전쟁의 폐허에서 한국을 일으켜 세운 건 미국이란 후원자와 베트남 전쟁 특수였다. 1970년대 오일쇼크 때는 중동 건설 붐이 한국을 살렸다. 80년대 중화학공업 투자 실패로 인한 위기는 일본의 도움으로 넘겼다. 막 열린 중국·러시아와 동구권 시장도 한국 수출산업에 돌파구를 만들어줬다. 90년대 말 아시아 외환위기 때는 선진국 시장 호황 덕에 금세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최근 국제유가가 천정부지로 뛸 때 우리가 버텨낸 건 중동과 브릭스(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시장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사면초가(四面楚歌)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변변한 시장을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전 세계로 확산한 탓이다. 선진국, 신흥국 가릴 것 없이 우리의 수출시장이 죄다 쑥대밭이 됐다. 게다가 금융위기 수습 과정에서 전 세계적으로 정부의 입김이 강해졌다. 이는 자유무역의 후퇴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자국시장 보호에 관심이 많은 민주당 버락 오바마 후보가 앞서가고 있다.

보호무역이 1930년대 대공황을 초래했다는 역사적 교훈은 식자층에나 통할 탁상공론이다. 당장 미국 자동차회사에서 수만 명의 실직자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런 판국에 한국·일본 자동차에 시장을 더 열어주자고 역설하고 나설 간 큰 미국 정치인이 몇이나 될까. 수출에서 성장의 활로를 열어야 하는 우리 입장에선 갈수록 어려운 경기가 될 수밖에 없다.

정부도 이런 사정을 감안해 이번 주 내수경기 부양을 위한 종합대책을 내놓을 예정이다. 그러나 그 정도로 머지않아 닥칠 쓰나미를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세계 동시 불황은 우리나라 내수 부양만으로 극복하기엔 너무 버거운 재앙이다. 오히려 어설픈 내수 부양은 고통의 시간만 늘릴 수도 있다. 당장은 힘들더라도 글로벌 거품경제 시대에 벌여놓은 과잉 설비와 소비는 빨리 정리하고 가는 게 길게 보면 회복을 앞당기는 지름길이 될지도 모른다.

정경민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