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꽃은 방랑 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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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호 02면

산바람·강바람 마주쳐 억새꽃 휘날리는 무딤이 들판을 걸었습니다.
잠시 눈을 감으면 익은 이삭이 뿜어내는 향기를 온몸으로 맡을 수 있고, 눈을 뜨면 바람이 억새 머리끝에서 백 개, 천 개의 빛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창수의 ‘지리산에 사는 즐거움’

억새꽃은 가녀린 외줄기 대공에 온몸을 의지한 채 바람빛이 흐르는 대로 몸을 맡깁니다. 바람춤을 춥니다.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으니 억새꽃 휘날리는 바람길은 방향이 없습니다.

방향이 없으니 어디로든 갈 수 있습니다. 방황이 아닌 방랑입니다. 억새꽃은 지금 방랑 중입니다. 방랑 속에서 간혹 수직과 수평을 생각하면서 구심과 원심을 생각하고, 높음과 넓음을 생각하면서 이기와 이타를 생각합니다.

마음을 흔드는 자재로운 바람을 맞으며, 어깨뼈를 치는 따뜻한 빛을 느끼며, 익은 벼가 속삭이는 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방랑길, 그 길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농사꾼 사진가 이창수씨가 사진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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