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들 그려유, 숨들 좀 쉬세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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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호 03면

“찔레꽃처럼 울었지….” 삶의 쓴맛, 신맛이 장아찌처럼 절여진 그의 목청이 가슴으로 우르르 날아온다. 아픈 걸 후벼내서 눈물 쏙 빠지게 하는 소리, 뚜르르 맺힌 것 풀어내 흐무러지게 하는 노래다. 꺼끌꺼끌 후드득후드득, 음을 벼려 가는 그의 솜씨는 세상의 슬픔을 너무 많이 알아버린 사람의 마음처럼 출렁 한다. 칼칼한 목울음이 한 대목 두 대목을 넘으며 응어리를 만들다가 퍽 쏟아내는 파열음은 쨍하고 갈라지는 얼음장 같다.

시대의 아픔을 풀어내는 소리꾼 장사익

“요새 다덜 되게 어렵잖아유.” 충남 홍성군 광천이 고향인 소리꾼 장사익(59)씨 눈초리가 슬그머니 처진다. 11월 8~10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여는 소리판 ‘꽃구경’ 표가 일찌감치 매진됐다는 얘기에도 “아유, 쪽팔려, 똥 같은 소리 말어유” 손사래를 친다. 자신을 서슴없이 ‘뒤풀이 가수’라 부르는 이 남자 목소리에 시대 풍경이 담겨 있다.

‘순대 속 같은 세상살이를 핑계로 퇴근길이면 술집으로’ 갔다가, ‘기진한 몸 텅 빈 가슴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사내들 뒤꼭지가 눈에 밟힌다.
“돌아 누워도 돌아 누워도/ 찾아오는 환장할 기침은/ 언제나 끝이 나려는지/ 밥그릇의 천길 낭떠러지 속을/ 비굴한 내 한 몸 던져버린 오늘/ 삶은 언제나 가시 박힌 손톱의 아픔이라고….”

‘기침’은 시대의 아픔이다. 장사익씨 개인사로 보면 기침은 혈육의 아픔이다. 폐암으로 돌아간 아버지가 밭은 기침으로 꺼칠해졌을 때 가벼워진 그의 몸을 안고 말했다. “아부지, 바깥에 낙엽 좀 봐유. 여름에 시퍼렇지유. 가을 오면 단풍 들고 안 떨어질라구 안간힘을 쓰잖아유, 사람이 다 그런 것 같아유.”

이번에는 어머니다. 시인 김형영의 시 ‘따뜻한 봄날’에 멜로디를 붙인 ‘꽃구경’은 죽음을 삶 곁자리에 두는 진혼곡이다. “어머니 꽃구경 가요/ 내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 /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깊은 산속에서 돌아갈 길을 잃고 헤맬까 걱정인 노모는 아들을 위해 솔잎을 따서 걸음걸음 뿌린다. ‘사는 게 이게 아닌데’ 하는 이들을 위해 장사익씨는 소리꽃을 뿌렸다.

선친은 고향 언저리에서 이름났던 장구잡이였다. 그 피내림 끼는 장사익씨가 이런저런 직업을 멀리 돌아 마흔다섯에 소리꾼으로 거듭나는 바탕이 되었다. 이제야 “헐 때까지 신나게 허다 갈” 가수의 길로 접어든 그는 읊조린다. “노래를 부른다/ 허리가 굽은 그가/ 탁자를 탁탁탁 치며/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 2008년 판 ‘희망가’는 해원의 소리다. 맺었다가 풀어버린다, 꽉 묶었다가 시원하고 개운하게 풀어버린다. 우리 소리의 맛이다.

태생이 풍류인인 장사익씨는 새납(태평소)을 잘 불고, 춤도 잘 춘다. 환갑이 낼 모레인데도 나긋나긋한 이 남정네 고민은 ‘어떻게 잘 노느냐’다. 어디 가든지 제 하고자 싶을 때 하고 하고 싶은 대로 노래하는 천상 예인이다. 연주자더러도 “먼저 하셔유, 내 쫓아갈팅게” 한다. 사람들이 객석에서 숨죽이고 뻣뻣하게 앉아있는 걸 보면 한마디 던진다. “왜들 그려유. 그 숨들 좀 쉬세유.”

음악 선배인 타악기 주자 김대환(1933~2004)이 생전에 던진 말 “스타가 되지 말라”를 그는 오늘도 되새긴다. 잘 노는 그의 소리를 듣고 슬픔을 이겨낼 힘을 얻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를 위해 목이 터져라 노래 부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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