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걸작 단편영화들 비디오로 감상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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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영화는 시간의.노예'와 같다.할리우드와 국내의 흥행영화는 대개 길이가 90분 안팎이다.이 90분은 관객이 지루함을 느끼지않으면서 영화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량을 상업적으로 연구한 할리우드의 결론.90분속에 일정분의 재미요소를 욱 여넣은 영화들이 대량 조립돼온 결과 플롯과 리듬이 엇비슷한 작품들이 주류를이룬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에 반해 단편영화는.상영시간 90분'이라는 상업성의 제약을벗어나 짧지만 분명하게 영화 고유의 상상력 세계를 맛볼수 있는은막의.해방구'다.
그러나 단편영화 비디오를 대여점에서 찾아보기란 하늘의 별따기다.상업성을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질 뿐더러 시장규모도 2천장에불과(.투캅스'등 흥행물은 10만장이 기본)해 상품화하는 일이극히 드물기 때문이다.이런 상황에서 최근 2년 간 세계 유수 단편영화제를 휩쓴 우수작품들을 한꺼번에 감상할 기회가 생긴다.
독립영화 제작사인 인디라인이 12월중 출시할.미지의 영화 라이브러리1-놀랐지!'.지난해 12월 열린 제1회 서울국제독립영화제 출품작중 칸.베를린.로카르노.오버하우젠영화제등에서 수상한우수 작품 7편을 골라 묶은 것이다.대사 대신 동작과 조명등 영상언어만으로 주제를 전하는 이.영화'들에 어색함을 느끼는 관객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4~18분 안팎의 쉽고 유머 넘치는 소품들이어서 조금만 진득이 지켜보면 단편영화만의 신선한 맛을 느낄 수 있다.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독일감독 바트 헬머가 만든.놀랐지!'와체코감독 미카엘라 파블라토바가 만든 애니메이션. 리피트'.
장난기 많은 남자가 자고 있는 연인의 침대 주위에 전기로 작동하는 도미노식 연쇄장치를 설치한뒤 스위치를 누르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놀랐지!'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실사로 옮긴듯 기발하고 경쾌한 상상력이 돋보인다.스프링.시계추.도르래 .물항아리.
바퀴등을 얼기설기 연결한 도미노장치로 잠든 여인에게 천국과 지옥을 교대로 선사하는 남자의 장난기가 마냥 즐겁다.95년 베를린.칸.토론토등 3개 영화제를 휩쓸었다.
96년 히로시마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 대상을 받은.리피트'는 끊임없는 일상에 지쳐있지만 일상을 탈출할 용기는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설득력있게 풍자한 수작으로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꼭 볼만한 작품이다.
매일 개를 끌고 쳇바퀴 돌듯 산책하는 신사,습관적으로 애인을껴안고 먼 곳을 응시하는 여인,시계 태엽처럼 일정한 동작으로 남편에게 밥을 떠먹이는 부인등 일상에 감금된.수인들'의 모습이거친 크로키를 통해 서글프고도 울림 깊게 다가 온다.
이밖에 시계추처럼 한 치의 예외도 없는 삶을 살다 어느날 개구쟁이들이 찬 공 때문에 혼란에 빠져버린 늙은 부부를 그린.푸코부인의 추'와 정거장에서 만난 아름다운 여인에게 말을 걸려고애쓰다 주저앉아버린 남자를 그린.정거장에서'역시 소외된 현대인의 자화상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수작들이다.

<강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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