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이 삼촌의 꽃따라기] 바위 위에 연꽃이 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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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동안은 선심 쓰듯 날씨가 좋았다. 그러나 3일째 되는 날 밤부터 폭우를 퍼붓는다. 압정처럼 쏟아지는 빗소리에 밤새 잠을 설친다. 가을 가뭄을 해갈시켜 주는 비라 반가워야 할 텐데 일정에 차질이 빚어질까 조바심이 난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 수만은 없어 우산을 받쳐들고 출사에 나선다.

바위솔이라는 이름이 붙은 식물은 종류가 적지 않은 데다 미처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변종도 제법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많은 바위솔 종류 중에 연화바위솔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것이 있다. 어릴 때 바위에 퍼져 붙은 백록색 잎이 연꽃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바위솔 종류 중 최고 미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연화바위솔은 야생하지 않는 야생화다. 너무 예쁘다 보니 사람의 손길을 많이 타 지금은 재배되는 것으로나 명맥을 잇고 있다. 그것이 제주도의 여미지식물원에 있다. 올해는 어떻게든 가까이서 찍고 싶어 지난해에 이어 다시 바다를 건너온 건데 하필 이날 자동 세차를 할 정도로 많은 비가 쏟아지는 것이다.

아, 그런데 주유소에서 상품으로 받은 우산이 줄줄 샌다. 전원으로 빗물이 들어가 카메라가 고장났던 기억에 일단 비부터 피하기로 한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다른 일정이고 뭐고 연화바위솔만큼은 제대로 찍자고 무작정 기다리기로 한다. 성질 급한 나는 기다리는 일에 젬병이다. 낚시를 좋아하면서도 하지 않는 이유다.

제주도에까지 와서 혼자 비 피하고 있는 신세가 처량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비는 좋다. 비 오는 풍경, 비 오는 소리를 즐기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기를 20분쯤 지났을까. 기적같이 비가 그친다. 게다가 햇빛까지 살살 들어준다.

이게 웬 떡인가 싶어 얼른 몸을 움직여 빗방울 머금은 연화바위솔을 담아낸다. 빛이 사라질세라 셔터 누르는 손가락이 평소보다 배가 빠르다. 새로 구입한 10~20mm 렌즈를 꺼내 광각으로 찍어보기로 한다.

오, 그런데 물 위로 하늘의 구름이 비친다. 몸을 낮추고 각도를 바꾸니 하늘의 구름은 물론이고 물에 비친 팔각정과 물 위에 뜬 수련까지 담긴다. 광각의 세계가 이리 멋질 줄이야. 수면에 잔물결이 이는 사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새삼 깨닫는다. 세상에 나보다 더 좋은 직업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사진을 다 찍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 다시 쏟아지는 비가 장난이 아니다. 장비를 거두고 한라산 1100고지에 올랐다가 안개비에 쫓겨 내려온다. 그만 가라는 뜻인가 보다. 제주항 제2부두로 가서 카페리에 몸을 싣는다. 3일간의 피로가 동승한 모양이다. 내년에는 연화바위솔을 들에서 만나는 대박을 꿈꾸며 일렁이는 배 안에서 곤히 잠든다. 

제주 글·사진= 혁이삼촌 이동혁(http://blog.naver.com/freebowl


■사단법인 한국식물사진가협회는 11월 1일부터 한 달간 경기도 용인시 한택식물원에서 제1회 ‘한국식물사진대전’ 입상작을 전시한다. 이번 사진전에는 금상을 받은 홍찬표의 ‘산솜다리(사진)’ 등 수상작 36점 외 협회 회원들의 작품 40점이 함께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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