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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일관성도 신중성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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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북한 잠수함사건이래 정부는 남북경협.경수로 지원.4자회담 노력등을 중단했으며,북한의 사과를 이들 사안과.실질적으로 연계'했었다.그러나 24일의 마닐라 한.미 정상회담은.수락할 수 있는 조치'를 요구하고는 있지만 제네바합의 계속이행 과 4자회담추진을 재확인했다.이는 물론 경수로지원 재개를 의미하는 것이다. 최근의 급반전은 지난 몇년간 정부의 대북(對北)정책이 보여준 모습을 압축적으로 되풀이하고 있으며,사회의 반응은 대북정책에 대한.신뢰성의 위기'양상마저 보이고 있다.서글픈 것은 대부분의 비판이 94년 8월 1차 제네바합의 직후처럼 초점을 이탈하고 있다는 것이다.준엄한 자기 성찰(省察)이 요구된다.미국이그럴줄 몰랐다면.무지'했던 것이요,미국을 설득하지 못했다면.무능'한 것이다.
한국의 대북정책은 구조적으로 주변 4강,특히 미국의 정책에 상당부분 영향받는다.이들 국가들은 모두.연착륙 유도'를 대북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다.미국의 연착륙정책은 제네바합의에 이정표지로 내삽(內揷)돼 있으며 재선된 빌 클린턴 대통 령은 이를 견고하게 추진해 나갈 것이다.공화당이 지배하는 미 의회의 영향력은 지난 2년처럼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구도에서 냉전시대에 유효했던 남한의 대북봉쇄는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남한 단독의 대북봉쇄는북한의 배후지(背後地)가 4강(强)으로 열려 있는 한 성공할 수 없다.만의 하나 성공한다 하더라도 이는 바람 직하지 않다.
어떠한 대가도 궁지에 몰린 북한이 감행할 배수전(背水戰.desperate war)의 참화를 능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은 그동안 대북관계개선이라는 구조적 요구와 봉쇄및 대결이라는 국내정치적 요구사이에서 일관성과 신중성을 잃고 표류해왔다.대북관계개선과.북한은 엔진이 고장난 비행기'.조만간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통일될 것'이라는등 냉전적 태도는 양 립할 수 없다.정책실패의 서글픈 결과는 30억~40억달러를 능가하는 쌀과경수로 지원비용이다.
환경이 급변했을 때는 적자(適者)만이 생존한다.전환기 인간사회에서는.기득권 정치'가 등장하게 되는데.전환기 정치'를 얼마나 빨리 극복하느냐가 그 사회의 성쇠를 규정한다.오늘날 한국에서 목격되는 것이 바로 구사고(舊思考)와 기득권의 저항이다.
탈냉전의 동북아 국제질서와 남한의 불가역적(不可逆的) 승리로끝난 남북간 체제경쟁은 관계개선을 주도할 수 있는 기회를 남한에 부여하고 있다.그러한 정책의 핵심은 수세에 몰린 북한의 체제와 정권을 위협하지 않고 정치적 신뢰를 구축하 는 것이다.이러한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는한 남북관계에서 어떠한 실질적 진전도 이루기 어렵다.
관계개선을 목표로 함에 있어.햇볕론'과.북풍론'은 부적절한 구분이다.환상적.민족주의'와 냉전적.이념주의'모두 실효성이 없다.요구되는 것은 신중한.현실주의'다.북한 체제와 정권에 대한위협을 일관성있게 자제하면서 미래 북한의 호의적 행동을 유도할수 있는 조치들을 인내있게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필자는 최근 한 발표에서 이번 사태가.이중언술(double-talking)'과 경수로지원재개로 귀결될 것이라고 예측한바 있다.북한은 막연한 행위에 대해 유감을 표명할 것이고,남한은 이를.성실한 사과'로 해석해 경수로지원을 재개할 것이다.마닐라정상회담은 조만간 북한측이.수락할만한 조치',즉 이중언술(二重言述)을 행할 것임을 예고한다.
4자회담 설명회를 포함한 남북대화가 성사될 가능성도 높다.그러나 적대감으로 가득찬 정권끼리 성과를 거두기는 쉽지 않다.내년 대선(大選)와중에서 전개될 국내정치는 또 한번 대북정책의 주요 시험대로 등장할 것이다.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겨 다가올는지도 모른다.
權萬學 〈경희대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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