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으로가는간이역>4.경춘선 '신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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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아버지'가 없었다.오랫동안 우리는 아버지 없는 시대를 살았다.80년대 이후 우리가 읽은 것은 .편모슬하의 문학'이었다.
아버지로 상징되는 기성세대.그들에게 존경과 권위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아버지는 용서못할 부당한 권력 혹은 그 협력자,기껏해야 무기력한 방관자였을 뿐이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또 한사람 하역(荷役)'이라고 쓰거나(황지우의 시.활엽수림에서'),.이제 해방이다'라고 만세 부르는(장정일)그런 존재였다.
.하얀 눈밭을 헤치고 붉은 산수유 열매를 따오시던'(김종길의시.성탄제')아버지를 잃어버린 사람들.시대와 사회에 대한 거친열정과 구호만으로 그 상실감을 달랠 수는 없었다.
권위없는 사회는 불행하다.시간은 오로라처럼 사라져 가 어느덧.서러운 서른살'이 된 아이들.존경과 사랑의 아버지는 되찾을 수 없을까.
초겨울의 아침.두귀에 헤드폰을 끼고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연주.12월'을 들으며 찾아가는 신남역(新南驛).
젊은이들이 없는 평일의 경춘선 기차는 조용하다.
봄이면 단합을 위한 여행에 나선 젊은이들로 가득한 경춘선 기차. 그러나 사람없는 겨울의 경춘선은 아버지를,아버지에게 돌려드릴 권위와 존경을,그리고 다시 찾아야 할 가족간의 믿음과 사랑을 곱씹어 생각하기에 좋은 공간이다.
북한강이 흐른다.경춘선 철길을 따라 길게 흐르는 북한강이 초겨울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윈스턴이 두드리는 투명한 피아노소리가 그 강위로 톡톡 튀며 구르는 것같다.
-아버지는 너무 고지식하셨다.당신은 평생 누구에게도 부끄럽지않은 생을 사셨다.
남 못할 일 한번 시키신 적 없었다.남들 다 하는 아부나 청탁은.세상에서 가장 빌어먹을 일'이라고 하셨다.
그래서였을까.승진도 출세도 아버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직장생활 20년만에 처음으로 양주 한병을 사들고 인사청탁을 하러 가셨다.
양주병을 든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날 밤 그 양주병 마개를 딴 사람은 높으신 웃분이 아니라 아버지 자신이셨다.
우리 아버지.20년동안 안하시던 일을 어떻게 이제와 하시겠다고.아버지가 도로 들고오신 양주 한병.
생전 처음 드시는 좋은 술,.세상에서 가장 비싼 술'을 아들과 대작하시며 아버지는 그냥 웃으셨다.-MBC일요드라마.간이역'(세상에서 가장 비싼 술)줄거리.
철도생활 25년의 신남역 역무원 신헌만(54)씨.
아들만 4형제를 뒀다.인생을 돌이켜보면 아들 4형제만큼 든든하고 또 고마운게 없다.큰 아들 관철(31)씨.그 역시 철도공무원이다.
춘천역 보선반에서 일한다.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아버지의 일을 아들이 계속한다.내놓고 말을 하지는 않지만 아버지는 그렇게자랑스러울 수 없다.
“뭐 제가 권한 적도 없고요,누가 권한다고 할 일도 아니고….그냥 본인이 좋아 하는 거겠죠.전 잘 몰라요.” 아들의 이야기를 묻자 건성으로 몇마디 던진 신씨.청색.적색의 수신호기를 들고 승강장쪽으로 나간다.역구내로 들어오는 화물열차를 유도하는그의 깃발들.
아버지가 흔드는 그 깃발들이겨울바람 속에서 힘차게,힘차게나부꼈다. <남춘천=최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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