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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31. 서울올림픽 유치(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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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올림픽 유치 움직임은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사라졌다가 5공 출범 직후 문교장관이었던 이규호 장관에 의해 다시 시작됐다.

 1978년에 열린 세계사격선수권대회가 88년 서울올림픽 유치에 기여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박종규 사격연맹 회장은 세계사격선수권을 성공적으로 마치자 박정희 대통령에게 “올림픽을 유치하자”고 건의했다.

79년 봄, 남덕우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국민체육심의회의가 열렸다. 박찬현 문교장관, 박종규 회장, 김택수 체육회장, 정상천 서울시장, 그리고 내가 모여서 올림픽 유치 문제를 토의했다. 분위기는 부정적이었다. 첫 모임은 결론 없이 끝났다. 두 번째 회의 때는 총리가 남덕우에서 최규하로 바뀌어있었다. 당시 IOC 위원이었던 김택수 회장은 “서울이 올림픽 유치를 신청해봤자 내 표 한 표 밖에 안 나올 것”이라며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박종규 회장은 저돌적이었다. “일단 해보고, 안 되면 모두 사퇴하자”고 했다. 그러자 김 회장이 “그만두려면 혼자 그만둬라. 난 그만두지 않는다”며 옥신각신했다. 결론은 올림픽을 개최하기에는 경제력이든 국력이든 시기상조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서거하는 바람에 올림픽 이야기는 사라졌다.

80년, 전두환 대통령의 5공화국이 시작되면서 올림픽 불씨가 살아났다. 불씨를 살린 사람은 이규호 문교장관이었다. 그는 “한국이 도약하려면 올림픽을 유치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전 대통령은 노태우 정무장관에게 이규호 장관과 올림픽 유치 문제를 협의토록 했다. 노 장관은 박종규 회장에게, 이 장관은 나에게 의존하면서 올림픽 유치 문제를 전개해 나갔다.

81년 2월, 태스크 포스가 결성됐다. 이규호 장관, 박영수 서울시장, 조상호 체육회장, 정주영 현대회장, 이선기 총리행정실장과 함께 매일 롯데 호텔에 모여 회의를 했지만 아무 대책이 서지 않았다. 4월에 스위스 로잔에서 IOC 집행위원회와 국제경기연맹 연석회의가 있었다. 80년 모스크바 IOC 총회에서 WTF의 승인을 받았으므로 나는 준회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런데 이때 IOC가 88년 올림픽 유치의사를 밝힌 서울과 나고야를 초청했다. 준비상황을 설명하라는 것이었다. 오래전부터 올림픽 유치를 준비해온 나고야는 준비 보고도 하고 영화도 상영했다. 그러나 서울은 회신도 하지 않았고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때까지도 올림픽 유치 여부를 최종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회의 도중 국제연맹 쪽 책임자인 토마스 켈러가 사마란치 IOC 위원장에게 건의를 했다. “나고야는 와서 설명을 했는데 서울은 회신도 없으니 유치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자격을 취소하자”는 것이었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서울도 준비하고 있는 줄 알고 있다. 무슨 사정인지 모르니 그냥 두자”면서 “유치 희망 도시가 하나보다 두 개가 낫다”고 말하면서 서울을 살려줬다. 회의가 끝난 뒤 사마란치 위원장에게 가서 “서울도 준비하고 있다. 감사하다”고 했더니 “돌아가서 준비나 잘 하라”고 했다. 위기일발이었다.

김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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