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돈 버는 사람은 불경기 때 나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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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호 24면

‘채권의 귀재(鬼才)’로 통하는 김형진(50·사진) 세종텔레콤 회장을 떠올린 것은 1997년 외환위기를 연상시킬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는 요즘 경제 사정 때문이었다.

‘채권의 고수’ 김형진 세종텔레콤 회장

그는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권성문 KTB투자증권 회장과 함께 외환위기 이후 몇 년간 ‘대박’을 터뜨린 성공 사례로 거론된다. 김 회장은 명동 사채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외환위기로 극심한 돈 가뭄이 오자 회사채 거래에 뛰어들어 큰돈을 거머쥐었다. 그 후 김 회장은 증권사를 인수해 어엿한 ‘제도권’ 금융인으로 변신했다. 요즘 같은 위기에 그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뜻밖에도 그는 통신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서울 역삼동 현대해상빌딩 11층의 세종텔레콤 회장실을 찾아 김 회장을 만났다.

“증권사를 팔고 통신사업을 하니까 ‘김형진이 망하러 들어갔다’는 이들도 있더군요. 통신업이 경쟁이 치열한 레드오션인 데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분야 아니냐는 얘기인데, 그렇지 않아요. 예전에 인터넷 사업을 경험했습니다. 99년 여성채널인 GTV를 인수해 동영상 포털을 세계 최초로 만들었는데, 회선·서버·스트리밍 기술 문제 등으로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투자한 게 지금 인터넷TV(IPTV)의 기반이 됐지요. 내가 너무 일찍 투자한 셈이지요.”

김 회장은 지난해 7월 법정관리 중인 통신업체 엔터프라이즈네트웍스(현 세종텔레콤)를 740억원에 인수해 통신사업에 뛰어들었다. 세종텔레콤은 국내·국제 전용회선 임대, 인터넷 전용선 임대, 인터넷데이터센터(IDC) 운영, 전화서비스 사업 등을 하는 기간통신 사업자로 전국에 1만5000㎞의 광통신망을 보유하고 있다.

김 회장은 내년 말 흑자 전환을 기대할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었다. 장비·회선 투자(4500억원)에 대한 감가상각이 거의 다 끝났기 때문에 현금 흐름이 매우 좋아졌다는 것이다. 그는 올해 790억원과 내년 1100억원의 매출을 예상했다.

그는 세종텔레콤 회장 취임 후 직원 급여부터 올려줬다. 팀장급은 연 4500만원에서 6000만원으로, 신입사원은 1900만원에서 2800만원으로 상향 조정했다. “노조로부터 ‘이상한 회장’이란 소리까지 들었지요. 하지만 좋은 사람을 쓰려면 임금을 올려야 했습니다. 세상을 도모할 때 가장 중요한 게 인재지요.”

노조에 대한 견해도 남다르다. 경영자의 잘못에 ‘태클’을 걸어줄 존재로 노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일 잘하는 사람이 노조에 적극 참여하도록 독려한다. “성과가 나쁜 사람이 모이면 앞서가는 사람 뒷다리 잡는 나쁜 노조가 됩니다. 능력 있고 성과가 좋은 직원이 노조에 참여해야 좋은 노조가 되지요.”

김 회장에게 요즘 돈을 어떻게 굴려야 할지 안 물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역시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내년 이맘때까지는 그냥 채권 같은 안전자산에 투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지금 예금금리가 연리 7~8% 수준이니 그것도 괜찮고요. 지금은 뭐니 뭐니 해도 유동성이 제일이지요.”

그의 집무실 책상은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담은 병풍에 둘러싸여 있었다. 『성학십도』는 말년의 퇴계 선생이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된 선조를 위해 성리학의 요점을 쉽고 간략하게 정리한 책이다. 김 회장이 『성학십도』에 ‘꽂힌’ 것은 92~93년 주식 투자에 실패하고 어려움을 겪을 때였다. 쓰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잡은 이 책에 흠뻑 빠졌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볼 줄 알고, 보이는 곳에서는 안 보이는 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김 회장은 인터뷰에서 이처럼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자주 했다. 무슨 뜻인지 다시 물었다. “살기 어려운 사람은 호경기(好景氣)에도 생기고, 큰돈 버는 사람은 불경기에도 나온다”는 부연설명이 돌아왔다.

실제로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았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93년 8월 금융실명제가 전격 실시됐다. 두 달간의 실명 전환기간 중에 3000만원 이상 현금을 인출하면 곧바로 명단이 국세청에 통보됐다. 당연히 명동 사채시장은 얼어붙었다. 누구나 실명으로 금융거래를 하기를 꺼렸다. 하지만 그는 세무조사를 감수하고 채권과 양도성예금증서(CD)를 실명으로 거래하는 모험을 해 큰돈을 벌었다.

외환위기도 그에겐 기회였다. 5대 그룹 회사채만이 조금씩 거래되던 시절 그는 5대 그룹이 아닌 30대 그룹을 찾아 다녔다. 당시 그가 자주 인용하던 말은 이독공독론(以毒攻毒論)이었다. ‘독은 다른 독으로만 치료할 수 있다’는 의미로, 고금리는 고금리 회사채 매매로만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회사채를 발행하는 기업과 회사채를 사려는 투신사 간의 거래를 ‘중개’해 돈을 모았다(이때 거래가 문제가 돼 김 회장은 99년 증권거래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98년 1년간 1조7000억원 상당의 회사채를 사고팔아 530억원을 벌었는데, ‘종금사나 증권업 면허 없이’ 회사채를 사고판 게 문제가 됐다).

회사채 거래로 번 돈을 발판으로 98년 부도 위기에 몰린 동아증권(이후 세종증권)을 27억3000만원에 인수해 ‘증권사 오너’로 변신했다. 세종증권은 홈 트레이딩 시스템(HTS)을 발 빠르게 도입해 사이버 거래 매매수수료를 절반으로 내리는 공격적 마케팅으로 돌풍을 일으켰다. 김 회장은 2006년 초 1100억원을 받고 세종증권을 농협중앙회에 매각했다.

요즘 그는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세종캐피탈을 통해 세종투자자문과 네오머니(종합자산관리)와 같은 금융 계열사에도 한쪽 발을 담그고 있지만 그 비중이 크지는 않다. 이번 위기를 기회 삼아 그가 본격적으로 금융업에 다시 진출할까. 그는 “괜히 (세종텔레콤) 직원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지금은 통신업에 전념할 때”라며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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