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이름뿐인 범죄 피해자 보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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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사례 1=지난 20일 30대 실직자가 서울 논현동의 한 고시원에 불을 지른 뒤 연기를 피해 뛰쳐나오던 입주자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6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의 ‘묻지마 살인’으로 근처 식당에서 일하던 중국동포 여성 등이 무고하게 희생됐다. 범인은 손해배상 능력이 없는 무일푼이어서 유족들이 위로금은 커녕 장례비마저 받을 길이 없다. 그런데도 경찰은 피의자의 인권보호를 이유로 범인에게 모자와 마스크를 씌워 얼굴을 감춰줬다.

#사례 2=1969년 4월 일본 도쿄의 한 고교 인근 진달래밭. 이 학교 1학년생인 가가미 히로시의 시신이 목이 베어진 채 나뒹굴고 있었다. 다음 날 밝혀진 범인은 놀랍게도 같은 반 학생. 그는 가가미가 평소 자신을 괴롭혔고, 사건 당일에도 자기가 칼을 자랑하자 “넌 돼지같이 생겼다”고 놀려 정신없이 칼을 휘둘렀다고 진술했다.

그는 소년범으로 소년원에 보내졌다. 이후 슬롯머신에 빠지기도 했던 가가미의 아버지는 신앙생활로 충격을 달래다 20년 뒤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욕설을 퍼붓고 기절하기를 밥 먹듯 했고, 여동생은 칼로 팔목을 긋는 등 자해행동으로 청소년기를 보냈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97년. 프리랜서 기자의 추적 결과 수용 3년 만에 소년원을 나온 범인은 아버지의 첩에게 양자로 입적돼 새로운 성과 이름을 얻고 명문대를 졸업한 뒤 변호사가 돼 있었다(오쿠노 슈지 『내 아들이 죽었습니다』).

 강력범죄가 해마다 크게 늘어나고 있으나 범죄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길은 멀고도 막막하다. 특히 서울 논현동 고시원 사건(사례 1)과 같은 ‘묻지마 살인’이 최근 증가하고 있다. 경찰청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우발적이고 충동적으로 살인 또는 방화를 하고 붙잡힌 피의자가 544명과 813명이나 된다. 문제는 이런 범죄자 대부분은 경제력이 거의 없는 ‘외톨이’라 피해자들이 배상을 받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서 있는 게 범죄 피해자 구조금 제도다. 생명·신체를 해하는 범죄로 인한 피해(과실범 제외)를 국가가 보상해주는 것이다. 국가엔 범죄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죄 피해로 사망한 경우에도 보상금은 최고 1000만원에 불과하다. 장해보상도 3등급으로 나눠 300만~600만원만 주고 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얼마 전 유족 구조금을 최고 2964만5000엔까지 올렸다. 우리 돈으로 환산해 4억원이 넘는 액수다. 장해 구조금도 14등급으로 세분화해 최고 3974만4000엔까지 주고 있다. 이를 위해 올해 확보한 예산도 22억3000만 엔으로 300억원을 웃도는 규모다. 같은 명목의 올해 우리 예산이 16억원임을 감안하면 비교하기조차 부끄럽다.

범죄 피해자 구조제도가 실효를 거두려면 보상요건도 대폭 완화해야 한다. 현재는 ‘가해자의 불명 또는 무자력(無資力)’을 엄격한 요건으로 하고 있다. 또 가해자와 피해자가 친족관계일 때는 제외 사유로 규정함으로써 보상 대상을 지나치게 제한해 버렸다. 따라서 보상을 폭넓게 인정할 수 있게 요건을 완화하고 치료비는 물론 소득상실·장례비 등의 실질적인 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보상금을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

 우리도 이제 예산 타령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미국의 연방범죄피해자기금(Crime Victims Fund) 같은 별도의 기금을 조성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다. 벌금이나 재정수입 등으로 130억500만 달러(2005년 기준)의 기금을 조성해 범죄 피해자의 치료비·변호사비·장례비와 임금손실에 대해 보상해주고 있다.

범죄자의 인권도 보호돼야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뒤 범죄자는 버젓이 활보하고 피해자는 불행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가가미 가족(사례 2)과 같은 역설이 생겨선 안 된다. 그러려면 국가가 발 벗고 나서 범죄 피해자의 고통을 덜어주고 눈물을 닦아줘야 한다.

신성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