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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보수화시대의 개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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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국사회가 보수화(保守化)돼 가고 있다.북한 잠수함 침투사건때문에도 그렇겠지만 실은 그 훨씬 이전부터 한국사회의 전체적 분위기가 보수화돼 가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가령 지난 총선 때만 보더라도 정치인들이 저마다 자신이 진짜 보수 라고 경쟁했을정도였다.
이러한 현상은 김영삼(金泳三)정권의 초기에만 해도 예상하기 어려웠던 변화다.많은 사람들은 30여년만에 처음 「문민정부」가들어서는 것을 보면서 「변화와 개혁」을 예상했다.그런데 최근에는 개혁이라는 구호는 별로 들을 수 없고 「안보 」라는 매우 낯익은 구호만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보수주의가 다시 살아나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좀 시야를 넓혀 관찰해 보면 최근의 보수화현상은 한국사회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전세계적인 추세인 것 같다.
미국은 내일 대통령선거를 하지만 클린턴 대통령의 재선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그런데 클린턴 대통령의 재선 비결은 그가 그 무슨 민주당의 정책노선을 내세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동안 공화당이 주장해 온 정책들,즉 보수주 의 정책들을그대로 채택한데 있다고 한다.그러니까 클린턴은 자신이 보수화함으로써 공화당 후보가 설 땅을 빼앗아 버린 셈이다.
영국에서는 다음 선거에서 노동당이 집권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그런데 노동당이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역시 보수화 전략이다.노동당을 이끌고 있는 토니 블레어는 이미 노동당의 전통적인정책들,즉 기간산업의 국유화 또는 친노조(親勞組 )주의등을 대담하게 포기하고 시장경제를 적극 지지하면서 정부의 불간섭과 규제철폐를 약속하고 있다.노동당의 승리를 예측하는 사람들은 모두한결같이 토니 블레어의 보수화를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지적한다. 일본도 최근에 실시한 총선에서 일본의 보수세력을 대표하는자민당이 다수를 차지했다.93년에 처음으로 자민당 정권이 흔들리면서 변화와 개혁을 위한 실험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면 지금은 또 다시 자민당이 주도하는 보수주의 체제로 복귀한 인상이다. 그밖에도 독일은 헬무트 콜의 보수정권이 집권 14년이 지났는데도 계속 건재(健在)하고 프랑스도 보수주의 정권아래에 있다. 어떻게 보면 서방세계의 보수주의는 이미 80년대에 깊이뿌리를 내렸다고 할 수 있다.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는 서방세계의 보수화 혁명을 일으킨 거대한 상징적 인물로 기록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레이건.대처의 보수화를 혁명이라고 부른다는 점이다.그 이유는 레이건.대처의 보수주의 정책이 과거 진보주의(進步主義)가 구축해 놓은 복지국가의 구조를 파괴하는데 초점이 두어졌기 때문이다.
복지국가 구조를 해체하는 작업은 90년대에도 계속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폭넓게 진행되고 있다.세계화에 따른 치열한 무한경쟁은 복지국가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만들었으며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는 정부기능을축소하고 시장기능을 강화하는 개혁이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지금 서방선진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보수화는 주어진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현상유지 정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개혁과 변화의 노력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떤가.아직까지도 우리는 개혁과 보수를 반대개념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만일 그렇다면우리의 보수주의는 생명이 없는,현상에 안주하는,침체를 자초하는화석으로 굳어버릴 수 있다.진정한 보수주의는 오 늘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해체해야 할 경직된 복지국가를 상속받은 것은 아니다.오히려 우리는 아직도 시장경제의 결함을 보완해야 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그러나 정부기능의 축소와 시장경제의 활성화,시민사회의 성장과 정치체제의 근대화등 아직도 개혁해 야 할 과제는 산적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보수화의 분위기에 휩쓸려 변화를 거부하고 현상유지를 고집한다면 우리는 보수의 이름으로 혁명을 지향하고 있는 서방국가들과의 경쟁에서 영구히 낙오자(落伍者)가 되는 운명에 놓이게 될 것이다.
金瓊元 〈사회과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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