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e칼럼

시끄러운 골프장에서 떠들썩한 브리티시 오픈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스코틀랜드의 골프는 마치 우리나라의 축구와 같다. 젊었던 내 아버지가 그 옛날 동네 조기 축구 리그에서 뒷머리에 빗맞은 공이 그물을 가르고 들어간 어이없는 결승골을 두고두고 자랑하듯 스코틀랜드 아저씨들은 동네 시영 골프장 7번 홀 그린 앞 항아리 벙커에서 타핑 난 공이 벙커 턱에 맞고 쓰리 쿠션으로 홀로 빨려 들어간 버디를 자랑한다. 허름한 동네 분식집 수준의 식당에도 골퍼의 기도가 걸려있고, 방 3개를 여행객들에게 빌려주며 근근이 생활비를 충당하시는 가난한 B&B 아저씨도 이 곳에서는 열혈 골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은 못내 부러운 대목이다.

브리티시 오픈은 스코틀랜드 전체를 들썩이고 있는 느낌이다. 펍에서는 브리티시 오픈을 생방, 재방한다는 안내문을 내걸고 손님을 부르고 저녁 술자리의 아저씨들은 저마다 이번 대회 우승자를 점치느라 침을 튀긴다. 아침방송 기상 캐스터도 브리티시 오픈 현장에서 골프장 날씨부터 예보하고, 헤드라인 뉴스도 당연히 브리티시 오픈이 열리는 골프장 화면이다. 고속도로 곳곳에는 The open 가는 길이라는 노란색 입간판이 들어섰다.

브리티시 오픈 1라운드가 시작된 아침, 커누스티 행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를 B&B 아저씨가 불러 세웠다. 한국의 KJ CHOI가 1라운드 선두로 나선 사실을 한시라도 빨리 알려주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TV에선 6홀까지 -4의 놀라운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KJ CHOI의 모습이 잡히고, 선두 선수의 실명을 불러주려던 해설가의 호의는 최경주 발음이 어려워 '콩주 초이'로 구현되고 있었다.

최경주 선수는 어제까지 선두와 6타 차 공동 3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첫째 날 8위에서 둘째 날 단독 2위로 껑충 뛰어 올랐던 그 기세라면 오늘 막판 뒤집기도 노려볼 만했다. 우린 최경주 선수의 계속된 선전을 기원하며 커누스티까지 한 시간여를 달렸다.

1인당 50파운드(약 10만원) 갤러리 티켓을 끊고 입장을 하려는데… 보안 검색원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소지품 검사는 물론이고 핸드 스캐너로 몸수색까지 한다. 불행하게도 핸드 스캐너는 성능이 우수했다. 핸드폰도 카메라도 모두 발각 되었다. 난 한껏 미소를 머금은 자상한 얼굴로 내가 카메라를 반드시 가지고 들어가야 하는 이유 100가지 정도를 댔다. 그러나 그 인도계 청년은 나보다 더 자상한 송아지 눈 빛으로 머리를 흔들어댔다. 단호하게 No 밖에 말하지 않는 그에게 엄청 맘만 상한 채 돌아섰다. 그리하여 브리티시 오픈 커누스티의 기록 사진은 빈약하디 빈약하다. 하지만 카메라 렌즈가 아닌 내 수정체에 충실한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최경주 선수는 비제이 싱과 한 조를 이루고 있었다. 비제이 싱이 먼저 티샷을 했다. 공은 똑바로 페어웨이를 향해 날아갔고, 임팩트와 동시에 터져 나온 카메라 셔터 소리가 갤러리들의 박수소리와 합쳐졌다. 곧이어 탱크가 자리를 잡았다. ‘뜨아~ 업그레이드 된 저 카리스마, 날카로운 눈매~’ 필시 한국에서도 몇 차례 갤러리를 하면서 최경주 선수를 보았건만 영국, 그것도 브리티시 오픈에서 만나는 최경주 선수는, 흡사 독일 아우토반 1차선에서 벤츠를 추월하는 현대차를 보았을 때의 뿌듯함, 영국 Tesco에서 노키아폰 보다 많이 전시되어 있는 삼성핸드폰을 보았을 때의 감동과 동종의 것이었다. 국내에선 늘 삐딱선 타는 불순분자이건만 외국에서만 작동하는 이 수출형 열혈 애국모드!

최경주 선수의 티샷도 정확히 페어웨이를 가르며 날아갔다.

갤러리로 선수들을 쫓아 코스를 돌며 느낀 점! 어렵다. 바람 세다. 벙커 크다. 코스 길다(커누스티의 전장 길이는 현재 브리티시 오픈 개최 골프장 중에 가장 긴 7,361 yd). 거기에 가늘고 긴 개울 두 개, Jackies Burn과 Barry's Burn이 코스 전체를 이리저리 꿰뚫고 지나가며 도처에서 밉살맞게 얼굴을 들이민다. 어떤 홀에선 드라이버 IP 지점을 걸쳐 흐르고, 어느 홀에선 세컨 샷 낙하지점을 지나고, 어디에선 아예 그린 앞을 유유히 흘러간다. 뭣보다 커누스티의 소음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애버딘에서 런던으로 향하는 익스프레스 철로가 커뉴스티 골프장 18번 홀과 맞닿아 있었다. 이 익스프레스들은 역을 통과하며 빠짐없이 경적을 울려댔다. 일부 선수들은 일주일 전부터 커누스티에 도착해 소음 적응 훈련을 했을 정도라고…

이렇게 변수가 많은 코스다 보니 여러가지 드라마가 연출되는 모양이다. 이번 대회에서도 가르시아 선수와 해링턴의 18홀 승부와 연장전은 충분히 드라마틱 했다.

18홀 그린을 둘러싸고 설치된 갤러리 석에 어렵사리 자리잡고 앉은 우린 우승컵 주인공을 점치고 있었다. 변수가 없는 한 가르시아의 승리가 예상되었다. 오늘 경기를 시작할 때, 가르시아는 2위와 3타 차 선두를 달리고 있었고, 공동 3위 그룹과는 6타 차로 벌어져 거의 우승을 예약한 상태였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이 골프였다.

18번 홀 그린에서 갤러리들은 챔피언 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서히 우승의 향방이 결정되려 할 무렵이었다. 그런데 대형 스코어 보드를 보니 경악할 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선두 가르시아가 보기를 범하고 아일랜드의 노장 해링턴이 이글을 잡아 전세가 역전되어 있었던 것이다.

박빙의 승부처는 18번 홀. 물을 두 번이나 건너야 하고, 악명 높은 벙커가 대거 포진하고 있는 18번 홀은 모든 선수들의 공포의 대상인 듯했다. 거의 역전 우승이 확정된 해링턴이 18번 홀 티박스에 오른 모양이다.

18홀 야디지 <출처 : carnoustie links homepage>

그러나 18홀에 티박스 쪽에서 뭔가 이상한 어둠의 포스가 느껴졌다. 웅성웅성…. 곧이어 장내 해설자가 해링턴의 티샷이 물에 빠졌음을 알려왔다. 그리고 드롭 후 다시 날린 해링턴의 서드 샷, 이번엔 반대편 갤러리 석에서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N~~~O~~~~"

그녀는 꽤나 실력있는 골퍼였던 모양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그 볼의 궤적을 읽어낸 장본인이다. 2~3초 후 들려온 또 다른 음향 "퐁~ 당~" 곧 이어 터지는 관중들의 아쉬운 탄성 소리… 우승을 눈 앞에 두고 절망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제 잘 해야 트리풀보기.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에서 해링턴은 차분하게 칩 샷을 홀 컵에 근접시켜서 더블보기로 막았다. 그리하여 최종 스코어는 7언더. 그런데 그 와중에 가르시아는 16번 홀에서 버디를 잡았다. 8언더.

잠시 후 가르시아가 18홀로 왔다. 이제 가르시아에게로 기울어진 저그컵, 파만 기록하면 무난히 우승하는 상황이었다. 아이언 티샷은 크게 문제가 없었지만 세컨 샷이 벙커로 들어갔다. 나름대로 벙커 아웃을 잘하여 홀 컵 2m 지점에 붙였다. 이제 남은 것은 운명의 퍼팅이었다. 그의 퍼터가 공을 때린 순간, 저그컵은 그의 품으로… 정확히 빨려 들어가는 듯 했…..으나 야속한 공은 홀을 오른쪽으로 훑고 나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세상은 요지경이다. 가르시아는 퍼터 그립에 머리를 꽂고 일어날 줄을 모른다. 아아… 그에겐 평생을 두고 땅을 칠 퍼팅이 될 것이다.

결국 연장전 끝에 아일랜드 출신 해링턴이 저그컵을 움켜쥐었다.
아일랜드와 영국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처럼 가깝고도 먼, 애증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니 아일랜드 선수에게 브리티시 오픈 석권은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경기가 끝나고 갤러리들이 돌아가버린 마지막까지 그 곳에 남아 아일랜드 국가를 부르던 몇 안되는 아이리쉬 갤러리단은 왠지 뭉클함마저 느끼게 했다.

때마침 하루 종일 흩뿌리던 비도 그치고 18홀 그린으로 쏟아지던 그 날의 석양과 잔상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이다겸 칼럼니스트

※ 매주 수요일 연재되는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