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곡마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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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임진왜란때 마군(馬軍)사이에서 시작된 기병무예(騎兵武藝)로 「마상재(馬上才)」라는 것이 있었다.달리는 말위에서 총을 쏘든가 옆에 매달리기,말위에서 물구나무를 서거나 누운 채 달리기,가로 눕거나 세로로 매달려서 달리기 등 말을 이용 해 보일 수있는 온갖 묘기들을 시범해 보이는 무예다.왜란이 끝난지 한참 후 이 「마상재」가 도쿠가와 막부(幕府)의 초청으로 일본에 건너가 시범을 보인 일이 있었다.그때 왜인들은 그 절묘한 기술에찬탄을 아끼지 않았고,그 말타기 기 술에 곡마(曲馬)라는 명칭을 붙였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조선 곡마」란 말이 통용되기도 했는데,그 이후 서양의 서커스가 도입되면서 그것을 흉내내 「곡마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흥행을 시작했으니 「곡마단」명칭의 유래는 한반도인 셈이다.일제치하인 1922년에는 「이탈리아 서커스」가 첫선을 보였고 28년에는 「채플린 서커스」가 다녀가기는 했지만 금세기 중반까지 한반도를 주름잡았던 것은 역시 일본의 곡마단이었다.그중에서도 야노(矢野).기노시타(木下)등 두 곡마단은 봄.가을에 번갈아 명동에서 공연을 갖고 나라잃은 조선인들의 피땀어린 돈을 우려내는데 여념이 없었다.
곡마단이나 서커스가 도입되기 전까지 비슷한 유형으로 대중흥행의 대종을 이뤘던 사당패는 자연스럽게 몰락했다.상당수는 서커스나 일본형 곡마단에 흡수됐고,또 상당수는 한국형 곡마단 창설에참여했다.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수백개에 달했던 한국 곡마단들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나름대로 쏠쏠한 재미를 봤지만 60년대 중반을 고비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지금은 불과 서너개의 곡마단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나마 관객이 모이질 않아 유명무실한 존재가 돼가고 있다 한다.
70년대 중반 작가 한수산(韓水山)이 소설 『부초(浮草)』에서 표현했듯 쇠퇴해가는 곡마단은 「화장을 해도 주름살을 가리우기에는 너무 늙어버린 창부의 얼굴」이다.하지만 향수(鄕愁)에 젖어드는 사람들은 아직도 적지 않다.
이에 착안한 서울시가 국내 곡마단의 원조격인 「동춘」의 지원에 나서 흥행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소식이다.이 또한서울의 풍물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할진대 끊어져가는 명맥을 잇게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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