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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83> 張學良의 반세기 연금생활<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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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일곱 번째 연금 장소인 기린동(麒麟洞)에서 감시인들과 있는 장쉐량(오른쪽 첫째)과 애인 자오이디(둘째). 지팡이를 짚은 사람이 감시조 ‘장쉐량 특무대’ 대장 류이광(劉乙光). 김명호 제공

1937년 1월 시작된 장쉐량의 연금은 90년 6월 1일까지 계속됐다. 53년6개월간 17곳을 옮겨 다녔다. 연금 장소는 한결같이 깊은 산속이었다. 50여 정의 권총과 박격포, 자동소총, 기관단총으로 중무장한 특무와 헌병들이 일거일동을 감시했다. 산책과 운동은 가능했지만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200m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 독서는 고전에 한해 허락됐다. 소식을 듣고 영국에서 귀국한 부인과 홍콩에 있던 애인 자오이디가 매달 번갈아 가며 함께 생활했다. 장제스의 허가 없이는 아무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 연금 장소와 이동 경로는 특급 보안사항이었다.

장제스의 고향 뒷산에서 첫 번째 연금생활을 할 때는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시안사변에서 총상을 입은 장제스의 이복형이 세상을 떠나자 문상 온 정부 요인들로 온 동네가 북적댔다. 장제스의 허락을 받은 쑹즈원·왕징웨이·천부레이 등 방문객이 줄을 이었다. 이구동성으로 장쉐량을 위로했다. 그의 식성을 잘 아는 쑹메이링은 오빠 쑹즈원 편에 망고 한 상자를 들려 보냈다.

소련에서 돌아와 생모를 모시기 위해 고향에 와있던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도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장쉐량을 찾았다. 장징궈가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장쉐량 덕분이었다. 1차 국공합작 시절 모스크바 유학을 떠난 장징궈는 장제스가 공산당을 숙청했다는 소식을 듣자 입장이 난처했다. “집에 올 때마다 우리 엄마를 때렸다”며 부친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성명서를 냈지만 여전히 불안한 소련 생활이었다.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장쉐량은 저우언라이에게 장징궈가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중공이 나서 줄 것을 요청했다.

마을 뒷산에 장제스에게 위해를 가한 불손한 인물이 와 있는 줄 알았던 장징궈의 생모 마오(毛) 부인은 아들의 설명을 듣자 모자를 다시 만나게 해준 장쉐량을 중추절 달 구경에 초대해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장징궈에게 장쉐량을 형님으로 모시라고 했다. 장제스와 결의형제를 맺은 바가 있었던 장쉐량은 그 아들과도 비슷한 것을 맺게 되었다.

항일전쟁이 폭발했다. 소망이 이루어진 장쉐량은 흥분했다. 장제스에게 전쟁에 나가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너는 전쟁에 나갈 수 없다. 생각도 하지 마라. 독서에 매진하고 일기를 열심히 쓰라”는 답장이 왔다. 만약 장쉐량이 출전한다면 전 국민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될 것은 불을 보듯 했다. 장제스가 용납할 리가 없었다. 중공이나 동북군 쪽에서 장쉐량을 탈취해 항일 지도자로 추대할 것을 염려한 장제스는 수시로 장쉐량의 거처를 옮기게 했다. 짧게는 사흘 만에 옮긴 적도 있었다.

장쉐량은 소년 시절부터 전장을 누볐다. 아버지 장줘린이 일본군에 의해 폭사당하자 극비리에 선양에 잠입해 28세에 동북의 군정(軍政)대권을 장악한 ‘동북의 왕’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꼬마원수(少帥)’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북벌에 성공한 장제스와 제휴한 후에는 전 중국의 2인자였다. 장제스는 그에게 베이징을 포함한 5개 성의 5권(입법·사법·행정·인사·감찰)을 일임했다.

전군의 부총사령관이었고 해·공군을 포함한 30여 만의 동북군은 장쉐량의 명령 없이 한 치의 이동도 불가능했다. 그가 외출할 때마다 연도에는 계엄이 선포됐고 행인들은 동작을 멈춘 채 벽을 향해야 했다. 백발의 국가 주석 린선(林森)도 이 청년장군을 윗사람으로 정중히 모셨다.
장쉐량의 행방을 알 수 없었던, 대서법가이며 시인인 위여우런(于右任)은 “아무리 불러도 청춘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믿지 않았고, 청사(靑史)에 빛나는 일이 한 줌의 재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부서지는 파도는 성찬이었고, 만리강산은 한 잔의 술이었다”며 중국 천지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장쉐량을 그리워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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