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스트리트 여피들이 사랑한 와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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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호 07면

지난 주말 부산에 다녀왔다. 부산국제영화제 때문이 아니고 어떤 대학에서 요청한 특강과 작은 와인 모임 때문이었다. 와인 애호가끼리는 대화의 벽을 빨리 허문다. 그날 처음 대면한 사람들과도 마찬가지였다. 어색한 수인사는 잠시뿐이었다. 첫 번째 와인 병을 다 비우기도 전에 우리는 마치 십년지기나 되는 듯 편안하게 말을 섞었다. 그날의 대화를 주도한 이는 ‘수불석권(手不釋卷)’이라는 아이디로 널리 알려져 있는 국내 최고 수준의 와인 전문가였다.

-‘아메리칸 싸이코’(메리 해론, 2000)의 샤르도네

수불석권은 국제적 신용평가회사의 한국지사장이다. 그는 현재 뉴욕의 월스트리트에서 촉발된 국제 금융위기에 대하여 와인 전문가만이 내릴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와인 가격의 거품을 만들어 내는 곳도 역시 뉴욕이야. 뉴욕 월가의 최고경영자(CEO)들은 비싼 레스토랑을 예약할 수 있는지로 자신의 비서를 평가하지. 어렵사리 예약한 레스토랑에 가 그들이 뭘 마시겠어? 아무렇지도 않게 ‘페트뤼스(Ptrus)’ 두어 병을 마시고 법인카드로 긋는 거야. 덕분에 고급 와인들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곤 했지. 그런데 최근 그들 중 대다수가 월가에서 퇴출되었어.

자그마한 종이박스에 소지품을 모두 털어 넣고는 책상을 비운 거지. 이제 누가 월가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그 비싼 와인들을 마실 수 있겠나? 거품이 빠질 수밖에 없어. 우리는 월가 최고급 레스토랑 몇 군데의 와인 매출현황만 주목하면 돼. 조만간 거품이 빠지면서 맨 얼굴을 드러낼 거야.”

과연 수불석권다운 냉철한 분석이었다. 뜬금없이 내가 대화에 끼어든 것은 이때였다. “혹시 ‘아메리칸 싸이코’란 영화 보신 적이 있나요?”

‘아메리칸 싸이코’는 몇 개의 키워드로 파악될 수 있는 영화다. 뉴욕, 금융자본주의, 월스트리트, 젊은 CEO, 명품 패션과 명품 와인, 그리고 정신분열증. 영화의 배경은 이른바 ‘레이거노믹스’가 월스트리트를 장악했던 1980년대 후반이다. 주인공인 패트릭(크리스천 베일)은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수재이고, 아버지가 회장으로 있는 월스트리트 투자은행의 CEO인데, 온몸을 명품으로 휘감고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홀짝거리는 27세의 청년이다. 겉모습만으로는 부럽기 짝이 없는 ‘여피(Young Urban Professionals)’의 전형인 셈이다.

하지만 패트릭의 내면 풍경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그는 세상과 소통할 줄 모른다. 그가 동화되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패트릭은 창녀와 섹스할 때도 거울 속의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한다. 그는 자기보다 우월해 보이는 모든 사람을 증오한다. ‘아메리칸 싸이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명함 자랑하기 시퀀스’다. 패트릭의 명함은 물론 훌륭하다. 하지만 동료들의 명함이 더 훌륭하다.

어떤 녀석은 실리언 레일을 넣었고, 다른 녀석은 달걀 껍데기를 박아 넣었으며, 또 다른 녀석은 테두리까지 장식한 입체식이다. 우리가 보기엔 그 명함이 그 명함일 뿐이다. 하지만 패트릭은 식은땀까지 흘리며 고통스러워한다. 아메리칸 싸이코는 그런 식으로 탄생되는 것이다.

동료 폴(자레드 레토)은 패트릭에게 큰 실수(!)를 했다. 패트릭보다 멋진 명함을 새겼을 뿐 아니라 패트릭이 예약하는 데 실패한 최고급 레스토랑을 제집 안방처럼 드나드는 것이다. 패트릭은 폴을 자기 집으로 초대한 다음 도끼로 토막을 내버린다. 일단 발동이 걸린 살인 욕구는 이후 걷잡을 수 없이 달려나간다.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모델 아가씨, 길거리에서 스친 여자, 옛 애인, 창녀, 노숙자, 건물 경비원, 그리고 경찰들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그는 자신의 변호사에게 자랑스럽게 털어놓는다. “내가 몇 명이나 죽였는지도 잘 모르겠어. 아마 한 40명쯤 되지 않을까 싶어.”

‘아메리칸 싸이코’는 텍스트가 두꺼운 작품이다. 브레트 이스튼 엘리스의 원작소설 자체가 출간 당시부터 논란거리였다. 이 작품을 각색하여 연출한 메리 해론이 유명한 페미니스트 여류 감독이라는 사실도 이채롭다. 이 영화는 스릴러와 호러와 코미디, 그리고 정신분석학 사이를 바삐 오간다.

내게 이 영화는 현대 금융자본주의의 속살을 보여 주는 듯하다. 실질적 재화는 전혀 생산하지도 않으면서 오직 돈놀이와 숫자놀음만으로 부를 키워 나가는 괴물. 덕분에 마치 현재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국제 금융위기의 예고편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 영화에는 다양한 와인 신(scene)이 나오는데 그것이 모두 ‘샤르도네(Chardonnay)’라는 것도 흥미롭다. 패트릭은 언제나 샤르도네를 마신다. 레스토랑에서 동료들과 마시고, 나이트클럽에서도 부킹한 여자들과 홀짝이고, 목욕하는 창녀에게도 샤르도네를 권하고, 조만간 토막 낼 옛 애인에게도 마약을 섞은 샤르도네를 내민다. 근거가 있는 설정인가? 그렇다.

미국인은 이른바 ‘프렌치 패러독스’라는 것이 소개되기 전까지 레드 와인보다 화이트 와인을 훨씬 더 많이 마셨고, 그들이 마신 화이트 와인의 대부분은 샤르도네였다. 1980년대 월스트리트의 젊은 CEO들이 샤르도네를 끼고 살았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 멋진 황금빛 샤르도네를 마치 ‘아메리칸 싸이코’의 와인처럼 소개하게 된 것 같아 마음이 언짢다. 기분 좋은 이야기로 마무리하자. 그날 밤 수불석권은 우리의 만남을 기리기 위하여 멋진 한시를 한 수 지었다. 홀로 감상하기에는 너무 아까워 이곳에 옮긴다.

본문 속 ‘견교루(見橋樓)’란 우리가 와인을 마셨던 아파트 거실을 뜻하는데, 커다란 통유리창 가득 불 밝힌 광안대교가 보여 그렇게 불렀다. 디캔팅을 ‘정주(整酒)’, 와인셀러를 ‘주고(酒庫)’라고 표현한 대목에서는 웃음이 절로 난다. ‘동서(東西)’란 보르도 지롱드 강의 좌안과 우안일 수도 있고, 보르도와 부르고뉴일 수도 있으며, 프랑스와 미국일 수도 있는, 함축적 표현이다.

見橋樓月滿
다리가 보이는 누각에 달빛은 가득하고
主整酒請友
주인은 술을 디캔팅해두고 벗을 청하네
來朋不空手
오는 친구 또한 빈손이 아니니
酒評如詩話
와인 마시고 평하는 게 마치 시나 글 같도다
談樂和香味
오가는 대화와 은은히 깔리는 음악은
와인 향과 맛에 버금가는 듯
主忙開酒庫
주인은 이래저래 셀러문 열기에 정신이 없네
東西紅爭勝
동서의 와인들이 누가 나은지 서로 다투는데
客笑誰能退
객은 미소 지으며 말하길
어느 와인 하나 버릴 게 없구료.


심산씨는 ‘심산의 와인예찬’ ‘한국형 시나리오 쓰기-심산의 시나리오 워크숍’ 등을 썼으며 현재 심산스쿨(www.simsanschool.com)에서 시나리오와 와인을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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