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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가를 탐험하다> 리차드 버턴 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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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버턴은 메카 순례를 성공적으로 일궜지만, 정작 자신은 그것에 큰 의미를 둔 것 같지 않다. 고지식한 괴짜가 명성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은 도리어 자연스러워 보인다. 리차드는 이름이 알려질수록 런던 생활이 더 힘들다고 느꼈다.

그는 유명세의 부담을 새로운 탐험으로 극복하려는 듯 1854년 다시 길을 나선다. 목적지는 금단의 땅 동아프리카의 도시 하라르였다. 아들의 탐험에 좀처럼 관여를 하지 않던 아버지는 이때만큼은 극구 반대하며 언성을 높였다. 당시 이슬람 요새를 여행한다고 길을 떠났던 몇몇 탐험가들이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처형당했다더라 하는 소문만 무성했기 때문이다. 리차드의 자신감을 북돋워준 것은 그의 특별한 언어능력이었다. 이방인으로 길을 나서는 것이지만,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점 때는 불필요한 오해를 사거나 치명적인 실수를 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자신했다. 그는 꼭 살아서 돌아오겠다는 아버지와의 약속대로, 이슬람교 요새까지 들어갔다가 무사하게 살아왔다. 죽지 않고 그곳을 빠져나온 최초의 유럽인이 된 셈이다. 이때 집필한 책이 <동아프리카에 찍은 첫 발자국>이라는 모험기다.

이슬람 순례를 성공적으로 마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는 백나일 강의 발원지를 발견해야 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하여 1855년, 존 해닝 스페케를 비롯한 영국 동인도 회사 간부 3명과 함께 소말리아를 침투하려고 마음먹는다. 그들은 철저하게 탐험 계획을 세워서 만반의 여장을 꾸린 다음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행운의 여신이 리차드를 보살펴 주지 않았다. 그들 모두 아프리카인들의 공격을 받아 다들 죽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것이다. 리차드 버턴 역시 날카로운 창에 얼굴을 관통 당해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히 창이 뚫은 것은 턱 끝 부분이어서 몇 개월 치료 끝에 간신히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떠돌이 버턴은 상처가 아물자마자 이번에는 또 어디로 여행을 떠날 것인지 골몰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러시아와의 전쟁에 쓰이는 지원병으로 활동하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1855년 7월 크림반도에서 리차드 버턴은 다음 여행을 꿈꾸며 기회를 엿볼 뿐 전쟁에는 별 관심도 없었다. 기다렸던 종전이 오자, 그는 다시 나일강의 발원지를 찾는 일에 착수했다. 1857년, 존 스페케를 다시 설득해서 탐험대를 이끌고 잔지바르를 통해 내륙으로 들어간 것이다. 죽을 고생 끝에 마침내 탕가니카 호에 도착했을 때, 버턴은 말라리아에 걸려 심각한 지경이었고, 스페케는 장님이 될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 와중에 스페케가 혼자 북동쪽으로 올라가 빅토리아 호를 발견했는데 그는 빅토리아 호가 나일강의 진정한 발원지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버턴은 그의 허술한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두 사람은 절교하기에 이르렀다.

진실 여부보다는 명성에 눈이 먼 스페케는 영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유명인 대접을 받으며 인생을 즐겼고 넘치는 스폰서들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그와 반대로 더 구체적이고 진실한 연구를 원했던 버턴은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해야 했다. 이에 낙담한 버턴은 1860년 미국으로 건너가 모르몬교도의 중심지인 솔트레이크시티 일대를 여행하고 ‘성자들의 도시’를 집필했다. 이 책에는 모르몬교도의 지도자 브리검 영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모르몬교도의 일부다처제 관습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져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게 된다. 명성의 덧없음을 익히 경험한 리차드은 영국으로 돌아온 후에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고 1861년 1월, 6년간 조용히 사귀어온 귀족 가문의 딸과 비밀리에 결혼했다.

다행히 리차드의 아내는 남편의 남다른 학구열을 이해하고 존중해주었으며 의기소침해지지 않도록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아내의 도움에 힘입어 영국 외무부에 요직을 맡게 되어 자신이 원했던 탐험을 원 없이 하게 된다. 서아프리카 해안 스페인령 섬의 주재 영사로 지냈을 때는 섬에서 지낸 3년 동안, 서아프리카를 곳곳을 탐험하여 5권의 책을 집필했다. 그 내용은 당시 유럽 사회에 파란을 일으킬 만큼 놀라운 것이었다. 종교의 제물로 바치기 위해 사람을 죽여 제단에 올리는 행위나 집단 성행위와 같은 충격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해놓았으니 세간의 반응이 어떠했을지 상상이 간다.

세상을 시끌벅적하게 뒤집어 놓은 그는 금단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충격적인 현실을 묘사하는 일에 매료돼 있었고 그것을 충실하게 기록하여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마저 갖게 되었다. 리차드의 사명감이 현실화된 데에는 아내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가 큰 몫을 차지한다. 버턴의 아내는 남편이 술독에 빠져 있거나 매춘굴을 기웃거려도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외무장관을 설득하여 남편이 원하는 지역의 영사로 임명되게끔 손을 써주었으며 굴욕적인 사건에 휘말리는 순간에는 혼신을 다해서 그를 변호했다. 리차드 버턴은 이런저런 방황 끝에 결국 성애 소설 쪽에 넋을 빼앗기는데 그의 아내는 그 순간에도 변함없이 내조를 아끼지 않았다.

1872년 리차드 버턴은 트리에스테의 영사로 떠나게 되는데, 이곳은 그의 마지막 낙원이 되었다. 리차드가 남긴 엄청난 분량의 학술서와 여행서를 바로 여기서 집필했다. 아이슬란드에 관한 책, 고대 국가 에트루리아의 도시 볼로냐에 관한 논문, 인도의 신드 지방에 관한 탐험서, 아라비아 미디안 족의 금광에 관한 기록, 아프리카의 황금해안에 관한 책 등 엄청난 분량이었다.

그 엄청난 책 중에서도 그가 가장 애착을 가진 것은 그의 초기 탐험서 그리고 훗날 공들여 번역한 성애소설이었다. 동양의 성애 소설은 그가 죽을 때까지 관심의 끈을 놓지 못한 영역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된 관심의 대상은 동양의 성애 소설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리차드를 고지식한 괴짜라고 손가락질 했지만 그와 아내는 사실은 그 반대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하는 행위에 대해서 발설하는 것을 터부시하는 사람들의 위선이 이 부부는 답답하고 못마땅했다. 버턴은 고대 동양의 성애 교본에 담겨있는 지혜를 서양에 소개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감옥을 들락거리면서까지 성애소설 번역을 계속했다. 이에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전해져 오고 있는 <카마수트라>, <아낭가 랑가> 등이 비밀리에 번역․출판되었는데 세간의 싸늘한 손가락질 속에서도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리차드 버턴의 사실적이고도 야한 서술체는 당대를 뒤흔들어놓을 만큼 과감했는데 특히 16권으로 이루어진 <아라비안나이트> 완역판은 그의 번역본이 아니면 아예 팔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외설문학, 동성애, 여성의 성교육에 관한 대담한 평론까지 곁들여 당시 사람들의 위선을 비웃었다. 그러던 1886년 2월, 버턴은 나름의 실력을 인정받아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성 미카엘 및 성 조지 중급 훈장을 받았다.

그로부터 4년 뒤 그는 마지막 유배지나 다름없었던 트리에스테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남편을 잃은 버턴의 아내는 안타깝게도 고인을 비난하는 세간의 손가락질을 못 견디고 남편이 남겨둔 원고를 모조리 불태워버린다. 인류학자들은 이를 엄청난 손실이라 지적하며 애석해 한다. 영국판 음란서생? 그럴 수도 있겠다. 그게 아니라면 탐험가의 정의를 새로 쓰는 건 어떤가. ‘세상을 탐하는 자’라고. 리차드 버턴이 맨 앞줄에 있다.

그림 및 자료 / 이시원

글/ 설은영

2008.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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