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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 세기의 파워시프트 시작됐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G2'라는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은 미국 월가의 유명 컬럼니스트인 윌리암 페섹이다. "앞으로 세계경제 구도는 G7(서방선진 7개국)이 아닌 미국과 중국으로 구성된 G2 위주로 짜여질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G2 중 하나인 미국의 경제가 지금 흔들리고 있다. 미국발(發) 금융위기는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중이다. 미국은 '금융정상화'를 위해 7000억 달러를 풀어야할 처지다.

미국은 이 막대한 돈을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 전문가들은 미국이 외국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고 분석한다. 미국에 자금을 공급할 수 있는 국가는 막대한 여유 외환을 보유하고 있는 중동과 중국 뿐이다. 특히 중국은 1조8000억 달러의 외환보유액을 갖고 있어 미국 경제의 '백기사'로 부각되고 있다.

불과 6개월 전만 하더라도 미국이 중국에 '도와달라'고 손을 벌리는 상황은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 지난 6월 미국 메릴린드주 아나폴리스에서 열린 제4차 미중 전략경제대화에서도 미국은 '위안화 가치를 올리라'고 중국을 압박했었다. 격세지감이다.

중국은 과연 미국 월가를 구할 백기사 역할을 맡을 것인가.

답부터 말하자. '예스(Yes)'다. '그럴 수 밖에 없다'라는 게 더 정확한 답일지도 모른다. 중국은 지금 미국의 상황을 강건너 불 보듯 쳐다볼 수만은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양국이 2000억 달러 규모의 미국 재부부 채권 매입 협상을 벌이고 있다'는 보도로 볼 때 중국의 미국 지원 가능성은 더 높아 보인다.

중국이 '월가 구하기'에 나서야 할 이유는 이렇다. 현재 중국이 갖고 있는 미국 금융자산은 약 900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 7월 말 현재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미국 재무부채권은 5187억 달러에 달하고 있다. 전체 재무부채권의 약 19.4%에 달한다. 이밖에 미국 상업은행발행채권, 단기채권, 주식 등에 4000억 달러가 넘는 중국 외환이 투자됐을 것으로 추산된다. 중국내에서도 "외환보유액 중 달러표시 자산이 지나치게 많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 금융이 회복되기 어려울 정도의 위기에 빠지게 되면 중국의 달러표시 자산 가치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중국이 미국의 금융위기를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는 수출 시장이다. 미국은 단위 국가로 볼 때 중국의 최대 수출시장이다. 작년 2562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기록했다. 올 들어 7개월 동안 1423억 달러, 올 한해 전체적으로는 최소한 2000억 달러 이상의 흑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은 최근 내수시장 육성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수출로 유지되는 경제다. 해외 시장이 죽는다고 수출 제품을 국내에 뿌릴 수도 없는 실정이다. 중국 국내 시장 역시 공급과잉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시장이 살아야 중국 경제가 온전하다는 얘기다.

미국과 중국은 그렇게 묶여 있다. 체제와 이념이 다른 두 나라는 정치적으로 갈등을 빚고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서로를 필요로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혹자는 이를 들어 '적대적 공존관계'라고 했다. 원수지간인 오(吳)나라와 월(越)나라가 같은 배를 탄 꼴이다.

적대적 공존관계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그 역사는 자못 길다.

2000년들어 미국경제는 '저물가 고성장'의 호황기를 구가하게 된다. 물가가 안정되니 금리를 낮출 수 있었고, 낮은 금리로 인해 돈이 풀리면서 경제는'더이상 좋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순항했다. 그러나 유동성이 너무 많이 풀리면서 돈은 부동산시장으로 몰렸고, 부동산시장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달러가 낮은 금리를 피해 미국에서 탈출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기도 했다. 그렇게 '서브프라임 사태'는 잉태되고 있었다.
미국의 '저물가 고성장'의 기반을 제공해 준 게 바로 중국이었다. 중국은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수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매년 20~30%대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저장(浙江)성 공장에서 한 달 10만 원을 받고 일하는 어린 소녀들이 만든 싸구려 제품은 미국 월마트의 상품 진열대를 채웠고, 미국 소비자들은 싼 값에 쇼핑을 즐길 수 있었다.

상품은 미국으로 갔고, 달러는 중국으로 갔다. 미국의 대(對)중 무역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2001년 830억 달러였던 적자액은 작년 2562억 달러로 불어났다. 미국이 중국에 대해 기회만 있으면 위안화를 평가절하 하라고 으름장을 놓는 이유였다.

그러나 중국으로서는 억울하다. 자기들이 필요하니까 수입해 놓고는, 이제와서 적자가 너무 많으니 줄이라고 압박을 가하니 말이다. 중국이 더 기막혀 하는 것은 달러의 흐름이다. 중국은 미국에서 벌어들인 달러로 다시 미국의 재무부 채권을 매입했다. 쌍둥이 적자가 그래서 나왔다. 중국은 미국에 무역으로 벌어들인 달러를 꿔주었고, 미국인은 꾼 달러로 마구 소비하는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서브프라임 사태가 터졌다. 중국은 자칫 미국에 꿔 준 돈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게 됐다. 미국에 돈을 너무 많이 꾸어 준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체면을 차릴 여유가 없다. 중국에 손을 벌려서라도 금융을 정상화시켜야 할 처지다. '차이나달러'에 대한 의존도가 더 높아지는 것이다. 둘은 그렇게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이가 됐다.
당장 아쉬운 쪽은 미국이다. 미국이 차이나달러를 얻어오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중국에 제공해야 한다. 그런데 미국이 중국에 줄 선물이 마땅치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미국의 경제적인 위상이 그만큼 떨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G2로 돌아가자. 윌리엄 페섹은 중국을 미국과 어깨를 견줄 슈퍼파워로 끌어올렸다. 미국을 오늘의 슈퍼파워라고 한다면 중국은 미래의 슈퍼파워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신·구 강대국의 파워시프트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충돌이 있는가하면 서로 협조하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 20세기 초 세계의 파워는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갔다.

그 후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또다시 슈퍼파워의 권력 이동을 목격하고 있다. 다만 상대가 미국에서 중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미국의 금융위기는 그 과정을 앞당기는 촉매제 역할을 할 뿐이다.

한우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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